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찌는 듯하던 여름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니 새삼 가을인가 싶다. 이 가을도 가고 추위가 찾아오면 어느새 또 한 해가 갈 것이다. 어느 누가 시간에 저항할 수 있으랴.세월은 무정하고 나이는 늘어가며 오직 주름살만이 나를 환영한다.

서른 살만 같아도 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서른 살이라고 해서 마냥 젊다는 기분에 취해 살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일찍이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그랬다. 서른 살이 되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젊다고 부르는 것을 그치지 않고 그 자신 일신상의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불안정해진다는 것,그리하여 이제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게" 된다는 것.

우리의 최승자 시인 역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했다. 그녀에게도 서른은 청춘과 결별하는 분기점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듯하다.

오죽하면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고 했을까. 그리고 연이어 그 유명한 마지막 구절이 온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 깔았네."

돌아보면 서른을 가지고 저렇게 비장할 수 있었던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삼십년 남짓 살고서 더 이상 살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호들갑 떨 수 있는 것은 그 또는 그녀가 아직은 젊다는 방증일 것이다.

마흔이 넘으면 그마저도 용이하지 않다. 청춘의 순결한 맹세가 더럽혀질까 가슴 졸이며 얼굴에 '철판' 깔았다고 위악을 부릴 수 있는 용기는 마흔에겐 다만 한 순간의 치기로 기억될 뿐이다. 무슨 일에든 자신의 인생경험만을 진리로 확신하며 절대적인 단언으로 상대방의 입을 막아버리는 것도 이 나이 언저리에서 시작되는 특징이다. 소설가 이남희의 말대로 마흔은 "이제는 고아가 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은 나이"다.

쉰 즈음엔 마흔의 고집마저 삶의 활기를 함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될까. 모르겠다. 다만 이즈음에는 나이를 먹는 사람의 자세 같은 것을 생각하게는 되었다. 잘 늙어가고 싶다는 것.10년 단위로 재생산되는 저 '나이의 신화'에 '항복'하지 않고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 것이다. 궁하면 통한다든가. 최근 한 월간지를 읽다가 58년생 황인숙 시인의 <<갱년기>>라는 시를 발견하고 처음에는 여전히 발랄한 그 화법에 재미있어하다가 종내에는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는 깨우침을 얻고야 말았다.

시인은 삼각지역에서 6호선 지하철로 갈아타려고 한다.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환승역을 향해 다시는 오지 않을 열차를 타기라도 하는 양 '필사적'으로 달려나온다. 그들을 살짝 피해 '건들건들' 걷던 시인,건들건들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6호선 승차장 가까이서 열차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시인 역시 '누구 못잖게 서둘러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인은 깜짝 놀라 외친다. "이런, 이런,/이런, 이런." 그리고는 결심한다. "건들거리던 내 마음/ 이렇듯 초조하다니// 놓쳐버리자, 저 열차!"

어쩌면 쉰이 되어서도 여전히 '건들거릴' 수 있는 비법은 바로 저것,모든 사람이 필사적으로 달려 나가 올라타려고 하는 열차를 놓쳐버리자고 마음먹을 수 있는 저 여유와 유머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청춘의 비장함도,중년의 비루함으로부터도 모두 자유로울 수 있는 비법을 소유한 '갱년기'라면 무엇이 두려우랴.저 '주문'을 잊지 말자."놓쳐버리자, 저 열차!"

신수정 < 문학평론가·명지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