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볼 시간도 있고….실적이 좋으니 여유가 생긴 모양"이라는 기자의 응수에 그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번 주 약속이 깨져서 우연히 봤어요. 그날 덕만(선덕여왕)이 잠자는 사자 미실을 깨웠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러가지 생각이 듭디다. "
어린 덕만과 춘추의 도발적 도전에 계속 물러서기만 하던 권력자 미실이 어느 순간 자신 속에 잠재해 있던 여왕의 꿈을 찾아내고 반격을 준비하는 장면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 깨달은 도전자들이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얼추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다시 물었다. "그게 실적하고 무슨 관계인데요?"
그는 "실적 좋은 거야 반가운 일이지만 걱정스러운 것은 경쟁구도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기업 입장에서 경쟁구도의 변화는 지각변동을 뜻하는 것이고,가장 어려운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경쟁구도 변화에 대한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한국 기업을 두고 승자독식 등의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뭔가 변해도 크게 변한 건 분명해 보입니다. 더이상 도전자가 누리는 혜택은 우리에게는 없을 거예요. " 한국 기업들은 수십년간 세계 시장에서 도전자였기 때문에 글로벌 선진 기업들의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이들을 추격하며 시장을 개척해왔다. 그러나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견제가 본격화될 것을 그는 걱정하고 있었다.
대화 중 몇 달 전 만났던 한 대학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특허 사냥꾼들이 한국 기업들을 타깃으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 기업들이 특허 사냥꾼의 먹잇감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이었다.
금융위기를 넘어 사상 최대 실적을 낸 한국의 대기업들은 더 큰 숙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글로벌 시장을 더욱 넓혀야 하는 '도전자의 과제'와 강화되는 경쟁 기업들의 견제와 추격을 뿌리쳐야 하는 '승자의 과제'까지 말이다.
김용준 산업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