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친구만 없으면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텐데…."

출근길이 천근만근인 김 과장,이 대리.'악질 상사' 때문만은 아니다. 맡은 일도 못하면서 남의 일까지 망치는 고문관 동료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내 영역으로 침범한 천적(天敵),'직장 내 라이벌' 탓이다. 처음에는 "열심히만 하면 조직이 인정하겠지" 했다.

하지만 라이벌의 사업 아이디어가 먼저 채택되고,선후배들이 그에게로 몰리며,그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둘 중 하나는 필요없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슬금슬금 들기 마련이다.

본능이 꿈틀거리는 게 이때다. '독주하게 할 수는 없다'는 '라이벌리즘'이 발동한다. 때로는 라이벌을 흠집내기 위한 궁리도 해본다. 술잔을 기울이며 좌절도 해본다. 그렇지만 어쩐지 비겁하고 나약한 것 같다. 싫어도 일로 승부할 수밖에.결국 라이벌을 '먹기 쓴 약'으로 생각하면 편하다. 분발하고 발전하는 계기로 삼으면 라이벌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다.

◆"제발 저 친구만 없었으면…"

중견기업 경영전략팀에 근무하는 이창준 차장(39)은 요즘 가을만큼이나 고민이 깊어간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경력사원 김 차장 때문이다. 김 차장은 굴지의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주말이 여유로운 회사에서 근무하고 싶다'며 중견기업으로 다시 '하향입사'한 유능한 친구다. MBA(경영학석사) 학력에 서글서글한 성격까지,경영전략팀에 합류한 날부터 팀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넘버2'였던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졌다는 점이다. 어느 날 후배가 "요즘 팀장이 회장 보고자료는 다 김 차장한테 맡기는 거 아세요"라고 말했을 때 '아차' 싶었다. 그러고보니 팀장과 김 차장이 따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횟수도 부쩍 늘어난 것 같았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위협하는 상황이다.

광고회사 상품개발팀에 다니는 최모씨(37 · 여)도 마찬가지다. 최씨보다 5년 늦게 입사한 후배가 눈엣가시다. 회의 때마다 내는 아이디어가 그와 겹친다. 그 후배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최씨는 신세대 코드에 맞는 발랄한 기획 아이디어를 척척 내는 사원으로 나이든 사람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이제 그의 존재가치는 무색해졌다.

후배가 자신과 비슷한 아이디어를 내도 "남들은 직장생활 10년 넘어야 할 일을 신참이 해내다니…"라며 찬사를 쏟아낸다. 최씨는 "공들여 쌓아온 사내 평판이 하루아침에 날아간 듯한 느낌"이라며 "무기력감 때문에 정신과 의사인 형부에게 몰래 상담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너만 크게 할 순 없잖아"

먹잇감과 배우자를 놓고 벌이는 경쟁은 자연생태계에선 본능이다. 직장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대리(32)는 깔끔한 일처리로 정평이 나 부서장의 신뢰를 독차지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직속선배인 이 과장을 제치고 부서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후배에게 물먹은 이 과장이 김 대리를 견제하는 방법은 '책임전가'다.

몇 달 전 김 대리는 협력업체와의 구매계약 업무를 처리했다. 계약 체결에 앞서 직속선배인 이 과장과 상의했다. 이 과장은 "작년 수준에서 계약을 맺으면 안전하다"고 귀띔했다. 작년 계약은 이 과장이 맡았었다. 김 대리가 작년 서류를 찾아봤더니 계약금이 1억원이었다. 김 대리는 수완을 발휘해 2000만원을 깎아 8000만원으로 계약을 맺었다.

부서장은 펄쩍 뛰었다. "경기가 좋지 않은데 너무 비싼 돈을 줬다"고.김 대리는 이 과장의 조언을 바탕으로 처리했다고 하소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사자인 이 과장이 "그런 일이 없다"고 발을 뺐기 때문이다.

'고자질'도 견제수단 중 하나다. 국내 중견 전자업체에 근무하는 박모 대리(33)와 최모 대리(33)는 입사동기다. 라이벌 의식이 있음은 물론이다. 두 사람의 주 업무는 영업소를 방문한 고객을 응대하는 것.어느 날 박 대리는 전날 과음을 한 뒤 출근했다. 술 냄새가 가시지 않은 건 물론이다. 한 고객이 술 냄새가 난다며 가볍게 항의했다. 다행히 부장은 외근 중이었다.

오후에 복귀한 부장은 최 대리에게 "오전에 별일 없었느냐"고 물었다. 최 대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있었다"고 오전의 사건을 흘렸다. 박 대리가 혼쭐난 건 당연지사.박 대리는 "공식적으로 잘못한 일이라 겉으론 머리만 조아렸다"며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보고랍시고 한 최 대리에게 복수할 건수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두자,그만두면 될 것 아냐"

라이벌을 표시나지 않게 견제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설픈 '공작'을 했다가 역풍을 맞는 일도 허다하다. 중견기업에 재직중인 안모 대리(32)가 그런 케이스다. 그는 얼마 전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같은 팀의 사원 하나가 오전 중 갑자기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더니 30분 만에 다시 나타났다.

"부장님,오늘 생신이라면서요? 사모님이랑 기분 좀 내시라고 외식상품권 하나 준비했습니다. "

공짜라면 마다할 리 없는 게 사람의 심리,부장은 말로는 "뭘 이런 걸 다…"라고는 했지만 기특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차 대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상품권 하나로 '차 대리와 그 부하'가 승기를 잡은 셈이다. 생일선물 사건 후 안 대리와 차 대리의 위상은 달라졌다. 찬밥 신세로 전락한 안 대리는 부장과의 술자리에서 "차 대리가 부장님과 상극인 김모 상무와 고교 선후배여서 조심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웬걸."왜 멀쩡한 사람 흠집을 내려고 해? 이 친구 안그런 줄 알았는데…"라는 반응만 돌아왔다. 되레 '모함질을 한 자'로 찍히는 역풍을 맞은 것이었다. 안 대리는 요즘 이직을 준비 중이다.

◆"생큐! 라이벌"

라이벌 간의 건강한 경쟁은 두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중견 제약회사에 다니는 김모 과장(37).지방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그는 명문대학 일본어과 출신 동기생인 박모 과장과 입사 초기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 사이다. 결혼도 대리를 단 첫 해에 같이 했다. 부인끼리는 여고 동창 사이.아이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들 딸 똑같이 하나씩 낳았다.

문제는 '개인기'.토익 만점자인 박 과장은 능통한 영어와 전공인 일어 능력을 인정받아 신설된 해외영업팀에 차출됐다. 이에 질세라 1년 반 뒤 김 과장도 신설된 전략기획본부로 발령을 받았다. 틈틈이 갈고닦은 중국어 실력과 최근 따낸 AICPA(미국공인회계사) 자격증이 빛을 발한 덕분이다. 김 과장은 "항상 앞서나가는 박 과장이 없었으면 그냥 영업실력만 믿고 회사를 여러 번 옮기는 방식으로 연봉을 높이는 데 만족했을 것"이라며 "영업이 아닌 다른 목표를 세우고 7년간 남몰래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데는 박 과장과의 경쟁심리가 작용한 게 사실"이라고 고마워 했다.

이관우/이정호/김동윤/이고운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