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드 인테르 에스트(quod inter est·사이에 있는 것)’

이 문구가 돈을 빌렸을 때 원금에 더해 갚는 것. 즉 이자의 어원이라고 한다. 과연 이자는 무엇의 사이에 있었던 것일까. 돈과 돈 사이? 시간과 시간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아니면 무릎과 무릎사이?

세계 각국이 경제위기시 긴급처방으로 내놨던 경기부양책을 거둬들이는 출구전략에 관한 논의로 분주하다. 특히 각국이 출구전략에 돌입했냐는 지표로 중시되는 것이 바로 금리. 각국 중앙은행이 기준이자율을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내외신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한마디로 이자 문제에 전세계 언론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바로 이 ‘이자’를 둘러싼 재미있는 글을 최근 접하게 됐다. 바로 영어에서 이자를 뜻하는 단어 ‘interest’가 어떻게 이자란 뜻을 가지게 됐는지를 설명한 구절을 우연찮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사실 영어사전을 뒤져보면 기본적으로 ‘관심’, ‘흥미’를 뜻하는 이 단어와 ‘이자’라는 뜻의 조합은 썩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미국에서 여러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모임인 하버드대 교우회 멤버로 활동한 이언 맥닐리와 리사 울버턴 부부가 쓴 ‘지식의 재탄생’에는 이 interest가 이자라는 뜻을 지니게 된 이유가 상세히 제시된다.

맥닐리 등에 따르면 원래 기독교권에선 시간은 신의 영역이라 여겼고, 빌려준 돈에 대해 ‘단지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추가로 돈을 받는 것은 신의 영역에 대한 인간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침해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서구 기독교권에선 채권자가 대부금에 대해 이자를 청구하는 모든 재정적 거래를 죄악시했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에겐 벌금부터 파문과 공민권 박탈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처벌이 내려졌다. 단테가 고리대금업자를 일곱번째 지옥에 분류해 넣는 등 이같은 활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도 이어졌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런 규제를 따르지 않았기에 중세 유럽에서 고리대금업자로 떳떳하게 활동하며 ‘고리대금업=유태인’의 공식마저 만들어지게 했다.

하지만 이자를 금한다고, 유태인에게만 맡긴다고 이자문제가 해결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 이자는 실생활의 주요한 요소로 계속 존속했고, 이를 실제적으로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실제적으로 이자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타협책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데. 이런 상황에 대해 교회법 학자들은 이자와 관련된 로마의 판례법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로마법의 문서 더미 한구석에서 발견한 것이 “채권자가 돌려받지 못한 돈에 대해 위약금을 부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판례였다.

이같은 판결에서 등장하는 원금과 원금에 위약금을 더한 금액의 차액은 ‘사이에 있는 것’이라는 뜻의 ‘쿠오드 인테르 에스트(quod inter est)’라고 불렸다고 한다.

교회법 학자인 볼로냐의 아초(ca.1150-1230)가 제일먼저 이 말을 줄여서 interest라고 불렀고(쿠오드 인테르 에스트 중 ‘인테르 에스트’가 줄어서 ‘인터레스트’가 됐다. 마치 오늘날 ‘솔까말’,‘마버’같은 축약어처럼...),현재는 실제적인 또는 가상적인 상환 의무 불이행에 대한 보상으로 재개념화 되기에 이르렀다.

유럽언어권에서 이자(interest)는 원래 원금과 ‘원금+위약금’간의 ‘사이에 있는 차액’이라는 말에서 그 이름을 얻은 셈이다. 이제 비록 interest라는 단어가 그 어원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이자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사이에 있는 것’이란 원뜻은 여전히 매력적인 듯 하다. 오늘날 이자는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 있는 것일까?


<참고한 책>
이언 F.맥닐리·리사 울버턴, 지식의 재탄생-공간으로 보는 지식의 역사, 채세진 옮김, 살림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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