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미국 뉴욕 맨해튼 3번가에 있는 광고 · 마케팅 대행사 맥켄에릭슨의 회의실. 고객사인 인텔의 새로운 마케팅 방안을 놓고 회의가 열렸다. 팀원들 중 가장 젊어 보이는 한 직원이 자기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설명만 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마케팅 효과를 높일 수 있습니다. " 설명이 끝나자 다른 직원들이 각자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서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을 마친 후 팀장은 직원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마련키로 하고 회의를 끝냈다. 인텔처럼 큰 기업에 관한 일을 젊은 직원의 생각대로 진행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고 묻자 팀장은 짧게 대답했다. "그의 의견이 가장 좋았다. "



◆도제식 교육은 없다

광고업계는 일반적으로 도제식 교육의 관습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위 '사수'라고 불리는 선배 직원 밑에 '부사수'라고 불리는 후배 직원이 배치돼 같이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중요한 일은 사수가 처리하는 동안 부사수는 잡무를 도맡으면서 눈치껏 사수의 노하우를 전수받아야 한다. 특히 한국의 광고회사에는 이 같은 관습의 뿌리가 깊다.

그러나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코카콜라 등 세계 일류 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는 세계 1위 광고 · 마케팅 회사 맥켄에릭슨의 모습은 달랐다. 모든 직원은 각자의 업무 영역을 갖고 독자적으로 일을 한다. 어떤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경력의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크리에이티브디렉터,카피라이터,아트디렉터,디자이너 등 각 분야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모여 팀을 구성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사수-부사수로 엮인 것이 아니라 전문성에 따른 협력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후배의 의견이라고 무시되는 일은 없다.

마이클 밀러 맥켄에릭슨 디지털마케팅 부문 수석부사장은 "아이디어는 팀원들이 모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가지를 쳐 나간다"고 말했다.

마르시오 모레이라 맥켄에릭슨 인사담당 부회장은 직원의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생각대로 일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일정 기간은 테스트 기간으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일을 맡긴다"고 밝혔다.

입사 직후 기초이론부터 배워

누구의 의견도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 의견이나 채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맥켄에릭슨이 "신입사원에게도 중요한 일을 맡긴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맥켄에릭슨은 매년 입사 1년차 직원을 대상으로 '수요 창조 기법(demand creation essential)'이라는 교육을 실시한다. 이 프로그램은 광고와 마케팅의 기초 용어에서부터 소비자 심리와 시장 분석에 관한 기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광고원론 수업인 셈이다. 1~2개월에 걸친 교육과정을 통해 신입사원은 탄탄한 이론으로 무장한 프로 광고인으로 거듭난다.

맥켄에릭슨이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이론 교육을 실시하는 이유는 '수요 창조 기법'이라는 교육 프로그램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 광고는 단순히 기발하고 재미있는 영상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 맥켄에릭슨의 철학이다. 광고를 보는 사람들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켜서 특정 브랜드나 제품에 대한 수요를 일으키고 판매로 연결되도록 하는 게 광고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모레이라 부회장은 "광고업계에서 필요한 창의성은 수요를 창조할 수 있는 창의성인데 이는 해당 업종과 소비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며 "이론적 기초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타고났다고 할 정도로 창의성이 뛰어난 직원은 별도의 교육이 필요없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며 "창의성이 다소 부족한 사람도 교육을 통해 얼마든지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친다

신입사원이 아니더라도 맥켄에릭슨 임직원들은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 맥켄에릭슨은 HFD(Human Futures Development)라고 하는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모든 임직원이 1년에 한 차례씩 이수하도록 하고 있다.

맥켄에릭슨 직원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방법과 공문서 양식,광고 전략을 수립하는 기법 등 업무의 전 과정을 HFD를 통해 익힌다. 심지어 '껄끄러운 동료에게 이야기하는 방법'이라는 항목이 있을 정도로 HFD의 내용은 다양하고 구체적이다. 팀장급 이상 직원을 위한 리더십 교육 과정도 따로 마련돼 있다.

HFD의 특징 중 하나는 현재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분야에 대해서도 공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광고 제작을 맡고 있는 직원이 회계에 대해서도 배워야 하고 인사를 담당하는 직원이 디자인 프로그램도 다뤄봐야 한다.

스튜어트 알터 맥켄에릭슨 교육담당 수석부사장은 "다양한 분야를 접해 보는 것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창의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업계의 변화에 따라 HFD의 내용을 매년 업데이트해 직원들이 최신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고 덧붙였다.

뉴욕(미국)=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