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74) 영도벨벳‥"아르마니도 우리제품 고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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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대 혼수상징 비로드"
생산량 80% 이상 수출 '세계 일류상품' 인증 받아
생산량 80% 이상 수출 '세계 일류상품' 인증 받아
이탈리아의 벨루티(Velluti) 가문이 발명한 벨벳은 이탈리아에선 벨루토,일본에선 비로드로 불리고 우리에겐 우단(羽緞)이란 이름으로 친숙한 섬유소재이다.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복식 재료로 특이한 감촉과 광택 덕분에 왕족 및 귀족의 의상이나 실내장식용으로 사용되어오다 대량생산이 이뤄지면서 일반에 보급됐다. 우리나라에서도 1960~70년대만 해도 '비로드 한 감이 없으면 혼수가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예물로서 벨벳의 인기가 높았다.
경북 구미의 영도벨벳(회장 류병선)은 1971년 국내 처음으로 벨벳을 자체 생산했고 현재 생산량의 80% 이상을 수출하는 '세계일류상품' 인증기업이다.
창업주 고 이원화 회장(1940~2004)은 대학을 중퇴하고 스무 살 시절부터 대구 대신동 시장에서 고무신 장사를 했다. 1966년 부산의 국제고무공장에 방한화용 털을 납품하면서 벨벳과 연을 맺었다. 털을 짤 물량이 가을과 겨울에만 있다보니 여름을 포함한 6개월가량은 기계와 인력을 놀려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남모직에서 나일론과 양모를 사들여 여성 양장지를 짠 뒤 서울 동대문시장에 내다 팔아 큰 호응을 얻었고 내친 김에 벨벳 국산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벨벳은 대부분 독일과 일본에서 밀수됐다. 이 회장은 이를 국산화하면 외화 낭비도 줄이고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벨벳의 입체감을 살리는 돌기를 어떻게 형성할지 몰랐다. 결국 제직기의 3분의 1 넓이만 이용해 기계가 노는 시간 틈틈이 시직(試織)을 했다. 다양한 비율로 날줄과 씨줄을 엮어보는 등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 8개월 만에 겨우 짜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67년 나온 시제품은 염색이 균일하지 않고 돌기가 군데군데 성기게 심어지거나 털이 쉽게 눕는 등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수율도 낮았다. 일반 옷감의 경우 제직기로 100야드(1야드는 91.44㎝)를 짤 수 있는 데 반해 벨벳은 불량률이 높아 같은 시간 동안 10야드가 나오는 데 그쳤다.
창업주는 책에도 관련 기술이 나와 있지 않고 해외 기술 도입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상황에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자금난 때문에 처갓집과 이웃들의 돈을 끌어 쓰기 일쑤였다. 1969년에야 비로소 양산에 성공해 대구 서문시장에 한복지를 첫 출하했다.
저고리와 치마를 만들 3.7야드 한복지는 당시 돈 1만2000원(현재가치 약 30만원)에 거래됐다. 품질은 여전히 미흡했지만 양장점에서는 자투리 천도 죄다 사가 옷을 만드는 데 활용할 만큼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71년에는 벨벳에 고운 색깔을 입히기 위해 염색공장을 설립했다. 다시 2년 뒤 일본 하세가와벨벳과 기술제휴를 맺고 일제 제직기 60대를 들여와 제품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이듬해 미국에 벨벳을 첫 수출했고 다시 1년 뒤에 서울에 무역사무소를 내고 중동지역을 대상으로 본격 수출에 나섰다.
이후 회사는 순탄하게 성장했다. 창업주는 위용도 당당한 세 마리의 독수리가 그려진 '쓰리 이글 벨벳' 상표를 붙이는 등 브랜드 마케팅을 펼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벨벳의 주된 수출대상국은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구소련 국가와 중남미 지역.척박한 환경에 사는 중동 및 중앙아시아 사람은 입체감이 풍부해서,남반구의 중남미 사람은 추운 겨울(우리나라의 봄 여름)을 나기 위해 벨벳을 선호한다.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중국산 제품은 1야드가 평균 2달러 정도에 불과하고 영도벨벳 제품은 5달러를 웃돌지만 해외 바이어들은 중국 제품보다는 '독수리 세 마리' 마크를 신뢰한다. '아르마니' '앤클라인' '자라' 등 세계 유명 의류업체도 영도벨벳 제품만을 고집할 정도로 해외에서 더 알려져 있다.
잘 나가던 이 회사도 1995년 단행된 400억원대의 구미공장 신설 투자와 2년 뒤 이어진 외환위기로 어려움에 빠졌다. 1998년부터 5년간 연속된 적자로 휘청거렸다. 창업주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건강도 악화되자 아내인 류병선 현 회장이 1997년부터 회사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1999년 회사 창고에 무려 200만야드의 재고가 쌓이고 500억원을 투입해야 회사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때 주위 기업인들은 일단 고의 부도를 내 재산을 지키고 나중에 재기의 기회를 노리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창업주 부부는 '회사 이름이 없어지면 40년 가까이 열심히 살아온 의미와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이라며 사재를 털어넣었다.
서울 강남의 빌딩용 부지와 아파트 수채,대구 서문시장과 서울 동대문시장의 점포 등 당시 100억원대,지금 가치로는 300억원이 훨씬 넘는 부동산을 처분했다. 2001년부터 3년간 진행된 워크아웃을 통해 400여명에 달하던 직원을 절반 가까이 줄였고 품질 관리 및 신제품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채권 은행들은 "영도가 무너지면 우리나라는 벨벳을 전량 수입해야 한다"는 류 회장의 호소에 채무를 탕감해줬다. 긴 터널을 지나 2003년부터 흑자전환한 이 회사는 올해 400억원의 매출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창업주는 고난을 넘긴 안도감에 잠시 숨을 쉴 만한 2004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류 회장의 장남인 이충열 사장(41)은 병역을 마치고 1994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는 데다 때마침 영도벨벳의 미국 에이전트가 필요해 자연스럽게 회사에 합류했다. 1996년부터 2년간 미국에 근무하면서 영도 제품에 통상 15%의 마진을 붙여 대리점에 넘기는 영업 업무를 수행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귀국한 그는 1999년부터 2년간은 영업현장,그후 3년간은 생산현장에서 뛰면서 시장과 공장을 두루 배울 수 있었다. 털털한 성격의 이 사장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직원들을 가족처럼 대하며 회사에 적응해갔다. 그는 "'낙하산 인사'란 말을 듣지 않으려 애써왔다"며 "다만 외환위기로 모자라는 회사 운영자금을 채우기 위해 서울의 전셋돈까지 뺄 당시에는 과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가 컸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벨벳은 때를 잘 타고 세탁이 어렵고 털이 쉽게 뭉개지는 것으로 알고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아 걱정이다. 그는 "요즘 나오는 제품은 물세탁이 가능하고 털도 꼿꼿이 서 있기 때문에 벨벳으로 자주 멋을 내줬으면 한다"며 "산업용 벨벳을 개발해 최근 수년간의 매출 정체를 돌파하겠다"고 밝혔다.
구미=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
경북 구미의 영도벨벳(회장 류병선)은 1971년 국내 처음으로 벨벳을 자체 생산했고 현재 생산량의 80% 이상을 수출하는 '세계일류상품' 인증기업이다.
창업주 고 이원화 회장(1940~2004)은 대학을 중퇴하고 스무 살 시절부터 대구 대신동 시장에서 고무신 장사를 했다. 1966년 부산의 국제고무공장에 방한화용 털을 납품하면서 벨벳과 연을 맺었다. 털을 짤 물량이 가을과 겨울에만 있다보니 여름을 포함한 6개월가량은 기계와 인력을 놀려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남모직에서 나일론과 양모를 사들여 여성 양장지를 짠 뒤 서울 동대문시장에 내다 팔아 큰 호응을 얻었고 내친 김에 벨벳 국산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벨벳은 대부분 독일과 일본에서 밀수됐다. 이 회장은 이를 국산화하면 외화 낭비도 줄이고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벨벳의 입체감을 살리는 돌기를 어떻게 형성할지 몰랐다. 결국 제직기의 3분의 1 넓이만 이용해 기계가 노는 시간 틈틈이 시직(試織)을 했다. 다양한 비율로 날줄과 씨줄을 엮어보는 등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 8개월 만에 겨우 짜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67년 나온 시제품은 염색이 균일하지 않고 돌기가 군데군데 성기게 심어지거나 털이 쉽게 눕는 등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수율도 낮았다. 일반 옷감의 경우 제직기로 100야드(1야드는 91.44㎝)를 짤 수 있는 데 반해 벨벳은 불량률이 높아 같은 시간 동안 10야드가 나오는 데 그쳤다.
창업주는 책에도 관련 기술이 나와 있지 않고 해외 기술 도입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상황에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자금난 때문에 처갓집과 이웃들의 돈을 끌어 쓰기 일쑤였다. 1969년에야 비로소 양산에 성공해 대구 서문시장에 한복지를 첫 출하했다.
저고리와 치마를 만들 3.7야드 한복지는 당시 돈 1만2000원(현재가치 약 30만원)에 거래됐다. 품질은 여전히 미흡했지만 양장점에서는 자투리 천도 죄다 사가 옷을 만드는 데 활용할 만큼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71년에는 벨벳에 고운 색깔을 입히기 위해 염색공장을 설립했다. 다시 2년 뒤 일본 하세가와벨벳과 기술제휴를 맺고 일제 제직기 60대를 들여와 제품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이듬해 미국에 벨벳을 첫 수출했고 다시 1년 뒤에 서울에 무역사무소를 내고 중동지역을 대상으로 본격 수출에 나섰다.
이후 회사는 순탄하게 성장했다. 창업주는 위용도 당당한 세 마리의 독수리가 그려진 '쓰리 이글 벨벳' 상표를 붙이는 등 브랜드 마케팅을 펼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벨벳의 주된 수출대상국은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구소련 국가와 중남미 지역.척박한 환경에 사는 중동 및 중앙아시아 사람은 입체감이 풍부해서,남반구의 중남미 사람은 추운 겨울(우리나라의 봄 여름)을 나기 위해 벨벳을 선호한다.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중국산 제품은 1야드가 평균 2달러 정도에 불과하고 영도벨벳 제품은 5달러를 웃돌지만 해외 바이어들은 중국 제품보다는 '독수리 세 마리' 마크를 신뢰한다. '아르마니' '앤클라인' '자라' 등 세계 유명 의류업체도 영도벨벳 제품만을 고집할 정도로 해외에서 더 알려져 있다.
잘 나가던 이 회사도 1995년 단행된 400억원대의 구미공장 신설 투자와 2년 뒤 이어진 외환위기로 어려움에 빠졌다. 1998년부터 5년간 연속된 적자로 휘청거렸다. 창업주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건강도 악화되자 아내인 류병선 현 회장이 1997년부터 회사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1999년 회사 창고에 무려 200만야드의 재고가 쌓이고 500억원을 투입해야 회사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때 주위 기업인들은 일단 고의 부도를 내 재산을 지키고 나중에 재기의 기회를 노리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창업주 부부는 '회사 이름이 없어지면 40년 가까이 열심히 살아온 의미와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이라며 사재를 털어넣었다.
서울 강남의 빌딩용 부지와 아파트 수채,대구 서문시장과 서울 동대문시장의 점포 등 당시 100억원대,지금 가치로는 300억원이 훨씬 넘는 부동산을 처분했다. 2001년부터 3년간 진행된 워크아웃을 통해 400여명에 달하던 직원을 절반 가까이 줄였고 품질 관리 및 신제품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채권 은행들은 "영도가 무너지면 우리나라는 벨벳을 전량 수입해야 한다"는 류 회장의 호소에 채무를 탕감해줬다. 긴 터널을 지나 2003년부터 흑자전환한 이 회사는 올해 400억원의 매출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창업주는 고난을 넘긴 안도감에 잠시 숨을 쉴 만한 2004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류 회장의 장남인 이충열 사장(41)은 병역을 마치고 1994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는 데다 때마침 영도벨벳의 미국 에이전트가 필요해 자연스럽게 회사에 합류했다. 1996년부터 2년간 미국에 근무하면서 영도 제품에 통상 15%의 마진을 붙여 대리점에 넘기는 영업 업무를 수행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귀국한 그는 1999년부터 2년간은 영업현장,그후 3년간은 생산현장에서 뛰면서 시장과 공장을 두루 배울 수 있었다. 털털한 성격의 이 사장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직원들을 가족처럼 대하며 회사에 적응해갔다. 그는 "'낙하산 인사'란 말을 듣지 않으려 애써왔다"며 "다만 외환위기로 모자라는 회사 운영자금을 채우기 위해 서울의 전셋돈까지 뺄 당시에는 과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가 컸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벨벳은 때를 잘 타고 세탁이 어렵고 털이 쉽게 뭉개지는 것으로 알고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아 걱정이다. 그는 "요즘 나오는 제품은 물세탁이 가능하고 털도 꼿꼿이 서 있기 때문에 벨벳으로 자주 멋을 내줬으면 한다"며 "산업용 벨벳을 개발해 최근 수년간의 매출 정체를 돌파하겠다"고 밝혔다.
구미=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