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29일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의 대리투표와 일사부재의 원칙 위배 등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놓으면서 야당이 요구했던 `가결 무효'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상 미디어법 유효를 인정해준 셈이다.

헌재가 야당 의원들에 대한 권한 침해를 인정하면서도 미디어법의 효력을 유지하는 일견 모순된 결정을 내린 것은 법적 안정성을 중시하고 국회의 자율성을 존중한 데서 나온 결론으로 해석된다.

헌재가 정치적 성격을 띠는 절충안을 냄에 따라 공은 다시 정치권으로 넘어가게 됐다.

◇ "대리투표 있었다" = 미디어법 강행처리 후 정치권에서 진실게임 양상으로까지 번지며 뜨거운 논쟁 거리가 됐던 대리투표는 결국 사실로 인정됐다.

이강국 헌재소장 등 재판관 5명은 방송사 화면 등을 살펴본 결과, 목적만 달랐을 뿐 여야 의원들이 모두 대리투표를 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 정상적 표결이라면 나올 수 없는 이례적인 전자투표 로그기록 등에 비춰봤을 때 신문법 표결은 공정성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졌으므로 헌법상 다수결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봤다.

야당 의원들에 대한 권리침해를 인정하지 않은 민형기, 이동흡, 목영준 3명의 재판관조차도 최소한 3건의 대리투표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다만 대리투표 횟수가 극히 적어 실제 표결 결과에 끼친 영향이 거의 없었으므로 야당 의원들의 권리가 침해됐다고 보지는 않은 것이다.

9명 중 8명이 대리투표의 실체를 인정했지만 김종대 재판관은 회의록에 명기되지 않은 대리투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 격론 거친 `일사부재의 위배' = 방송법 첫 표결 시도 때 의사정족수 부족으로 표결이 무산되자 국회부의장이 재투표에 부쳐 가결한 것을 놓고 재판관 5대 4의 아슬아슬한 표차로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겼다는 결정을 내놨다.

조대현 재판관 등 다수는 표결이 끝난 상태에서 과반수가 출석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다시 표결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부결이 확정된다고 판단했다.

국회의원이 특정 안에 반대하는 경우 출석해 반대표를 던지는 대신 불출석하는 방법으로 반대 뜻을 표시할 수 없다는 점을 중시한 것이다.

반면 이 소장 등 나머지 4명은 과거 국회의 실무 관행 등에 비춰봤을 때 의결 정족수에 미달한 국회의 의결은 유효하게 성립된 것이 아니어서 재표결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반대 의견을 냈다.

대리투표와 재투표 문제뿐 아니라 신문법 투표 직전 의원들의 질의ㆍ토론 절차를 생략한 것도 하자로 지적됐다.

이 소장 등 6명의 재판관은 상임위원회 심사를 거치지 않고 직권상정된 법률을 질의ㆍ토론 없이 곧바로 표결한 것은 국회의장의 자율적 의사진행권한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결론냈다.

◇ 권한침해 인정…"무효는 아니다" = 헌재는 신문법의 경우 재판관 7대 2, 방송법의 경우 6 대 3 의견으로 야당 의원들의 권리가 침해됐음을 인정했다.

두 법률 개정안의 절차상 문제가 적지 않은데도 미디어법이 유효하다는 쪽으로 사실상 결론을 내린 것은 국회 입법절차상 하자를 하나하나 문제 삼아 그때마다 법안을 무효로 한다면 큰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헌재는 같은 논리로 1997년 신한국당에 의한 노동법 날치기 통과 때 야당이 낸 권한쟁의 심판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여당 의원들이 몰래 모여 날치기 통과를 한 것은 야당 의원들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지만 결론적으로는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된 만큼 헌법상 다수결 원칙을 어긴 것은 아니라는 것이 당시 헌재가 내놓은 법리적 해석이었다.

다수결 원칙이나 회의공개 원칙 같이 헌법에 명시된 규정을 어긴 것이 아니라면 법률 수준의 국회법을 어겼다고 이미 통과된 법률을 무효라고 결정지을 권한이 헌재에는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29일 결정에서는 헌재가 권한쟁의 심판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는 수준에 머무름으로써 해당 기관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도 부각시켰다.

한 마디로 국회의 입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소장과 이공현 재판관은 "기능적 권력분립과 국회의 자율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원칙적으로 심의ㆍ표력권 침해만 확인하고 시정은 국회의장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setuz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