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가 위기의 시대를 맞았다. "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4일 '21세기 글로벌 리더십의 청사진'을 주제로 한 기조연설에서 짧은 한 문장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대공황 이후 80년 만에 불어닥친 국제적 경제위기로 인해 세계 경제를 유지해 오던 질서가 무너졌고 기후변화에 대한 위협도 커졌다는 점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국지적으로 벌어지는 분쟁에서 자국을 보호할 방법을 찾는 것도 시급한 과제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그는 위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 해법으로 '글로벌 협력'을 제시했다.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 경제와 안보,환경 등의 난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과거 서방 선진국 중심이던 글로벌 협력의 주체를 한국이나 중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금융위기 쓰나미'가 남긴 것

슈뢰더 전 총리는 지난해 말 시작돼 전 세계를 불황으로 몰고간 금융위기를 쓰나미에 비유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쓸어갔고 첫 번째 파도(금융위기)보다 두 번째 파도(글로벌 불황)가 더 무섭다는 쓰나미의 위력과 닮았다는 것.그는 "금융위기로 전 세계가 입은 피해가 10조5000억달러에 달한다"며 "세계 인구를 감안할 때 1인당 1500달러의 손실이 났다"고 말했다.

금융위기에 대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의 대처에 대해서는 "비교적 신속하고 적절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경기부양을 위해 글로벌 국내총생산(GDP)의 4%를 쏟아부은 덕에 생각보다 일찍 회복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향후 과제로는 금융시스템 정상화를 통한 은행 대출의 활성화를 꼽았다. 대출시장을 활성화하지 않으면 침체된 경기와 맞물려 경기 위축이 더 심각해진다는 게 그의 견해였다.

◆경제 활성화 열쇠는 신흥공업국의 투자

슈뢰더 전 총리는 "금융위기가 글로벌 경제질서를 바꿔 놓았으며 새로운 주인공은 신흥공업국"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신흥공업국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금융위기로 인한 상처의 치유 속도가 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신흥공업국이 글로벌 금융시장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위기 극복을 앞당길 수 있다"며 "국부펀드로 묶여 있는 신흥공업국 자본이 세계 경제 재건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FTA(자유무역협정)와 같은 양자 간 무역체제가 아닌 다자 간 무역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자 간 무역체제가 더 공평하며 글로벌화의 혜택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공산품에 대한 관세 인하,서비스 산업 자유화,농업 보조금 축소 등에서 각국이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며 "특히 미국과 유럽이 보다 많은 양보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에너지 안보 위한 국제공조 강화해야

기후변화 문제에 빨리 대처하지 않으면 세계가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슈뢰더 전 총리는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고 에너지 효율을 향상시키는 작업을 서두르지 않으면 세계 각국에서 빈곤과 폭력,집단이기주의가 만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우리 삶을 위해 자녀들의 희생을 요구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에너지 공급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문제도 언급했다. 그는 "붕괴 위기에 처해 있는 에너지 공급 국가들의 안정을 위해 각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며 "다자 간 에너지 기구를 구축해 협력과 연대를 도모하고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 문제에서 손떼야

슈뢰더 전 총리는 미국 등 선진국들이 아프가니스탄 문제에서 손을 뗄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탈레반이 무너진 지 7년이 지났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국제 파병군의 철수 시기를 결정할 때가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슈뢰더 전 총리는 "아프간의 내부 문제는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며 "일정 기간 아프가니스탄이 자생할 수 있도록 행정기구나 사회 인프라를 만드는 작업을 도와준 후 파병군을 철수시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저출산,고령화 추세를 감안,보험과 연금 등의 사회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슈뢰더 전 총리는 "출산율 저하로 근로층이 얇아지면 의료보험과 연금제도 등도 더 내고 덜 받는 방향으로 손질해야 하지만 각국 정치권이 재선을 의식해 제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