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옛 동베를린 중심가인 알렉산더플라츠 인근의 한 비즈니스 호텔.독일 통일 20주년을 취재하겠다고 했더니 독일 친구들이 베를린에 머물기엔 '실용적'이라며 추천해준 호텔 체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호텔을 찾아가는 길부터 쉽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음침한 골목길을 헤매며 비슷한 곳을 뺑뺑 돌았고,밤 늦게 생수 한병 사기 위해 호텔문을 나서니 어두운 인적 없는 거리엔 일부 아프리카계 흑인과 허름한 옷차림의 터키계 청년들이 공포 분위기만 조성하고 있었다. 주변에 흉물처럼 남아있는 '히틀러 벙커'와 퇴락한 건물들은 옛 동독지역의 낙후된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옛 동베를린의 퇴락한 중심가 모습은 다음날 방문한 서베를린의 번화가인 쿠담이나 프리드리히슈트라세,소니플라자 등의 화려한 조명과 수많은 명품숍과 극단적인 대비를 이뤘다. 부유한 서독과 가난한 동독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여전히 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는 9일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이 되는 날이지만 독일 내에는 동서독인 간에 여전히 장벽이 남아있다는 것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회사원 볼프 도르프만씨(45)는 "베를린 시내만 다녀봐도 동독 지역은 개발이 더디고 우중충한 건물이 그대로 남아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 동독 지역 개발을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지만 20년이나 지났어도 아직 격차는 여전하다"고 설명했다.

비밀경찰 슈타지의 감시와 사찰로 얼룩진 과거 동독 시절의 정신적 트라우마(상흔)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동독 시절 친한 친구나 이웃이 슈타지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심리적 충격에 고통을 겪고 있는 중장년층 이상 독일인이 적지 않다는 것.이는 젊은 세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베를린 지역 출신인 회사원 안나 제츨러씨(31)는 "옛 동독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물론 전반적으론 통일 독일을 훨씬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하다.

옛 동독인과 서독인 간의 경제적 · 사회적 격차도 여전했다. 한국말로는 굴뚝청소부쯤으로 번역될 '숀슈타인페거'로 일한다는 스벤 크뤼거씨는 "굴뚝청소에서 배관 배선 등 가옥관리 관련 일로 먹고살고 있지만 일감이 별로 없다"며 "옛 동독지역에선 제대로 된 일자리가 거의 없고 젊은이들은 서독지역으로 떠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옛 동독인과 서독인은 옷차림,말투 등에서 모두 차이가 나 독일사람들은 척하면 동독 출신인지 서독 출신인지 구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옛 동독지역 근로자들의 명목상 임금은 서독 근로자들 수준에 육박해 있다. 하지만 고임금에 부담을 느낀 기업들이 채용을 꺼려 실업률이 높은 탓에 실질소득은 서독의 77% 수준에 불과한 상태다. 옛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18.7%로 서독의 2배에 달한다.

물리적으로는 분단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옛 베를린장벽의 경계선은 독일 의회(분데스탁)와 분데스부르크 광장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진짜 장벽의 모습이 남아있기를 기대하고 찾아온 관광객들이 '어디 있느냐'며 두리번거리다가 평평한 바닥에 남아있는 두 줄짜리 표지석을 발견하고 실망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래도 이 경계선을 딛고 서서 사진 한장 찍는 일은 빠뜨리지 않았다. 진짜 장벽의 일부분은 광장에서 약간 떨어진 소니센터 앞에 남아 있다. 장벽 앞에서 옛 동독 경찰복 차림을 한 남성 두 명이 옛 동독 여권 스탬프를 복제해 관광객들에게 찍어주고 1유로를 받는다. 구겨진 동독경찰 복장과 삐뚜름히 눌러쓴 모자가 분단 시절 독일을 희화화하는 것 같아 묘한 느낌이 든다.

베를린장벽을 무너뜨린 1989년 혁명의 성지 라이프치히로 가는 기차 차창 밖에는 여전히 남루한 동독지역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라이프치히에서 관광가이드를 하고 있는 한스 마르켈씨(33)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 사람들은 곧 서독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가졌지만 금방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무엇보다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한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역사학자들은 독일 통일을 최초의 '탈이념 혁명'으로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1989년 혁명은 유럽의 통일을 촉진시켰고,사회주의의 몰락과 동서냉전에 큰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통일 20년이 지났지만 경제 · 문화 · 사회적으로 동서 간 격차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다. '격차 좁히기'는 진정한 통일 독일로 가는 최대 과제다.

베를린 · 라이프치히=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