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은 안 된다는 편견을 버리고 세계 무대에서 당당하게 겨뤄야 합니다. 제가 한국 최고에만 만족했다면 US오픈 16강 진출은 요원했을 겁니다. 자주 메이저대회의 문을 두드릴수록 한국 테니스의 위상이 높아지고 세계적인 선수도 등장할 겁니다. "

'한국 테니스의 간판' 이형택(33 · 사진)이 24년간 정든 코트를 떠나 지도자로 새롭게 출발했다. 강원도 춘천 송암동 의암스포츠타운 내 '이형택테니스아카데미'를 연 것.그는 의암호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코트에서 국가대표 임용규(안동고) 안재성(한솔) 등과 중 · 고등학교 유망주 10명가량을 가르치고 있다.

이형택은 강원도 횡성 우천초등학교 3학년 때 테니스 라켓을 잡은 뒤 원주중,봉의고(춘천)를 거쳐 건국대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때 테니스부가 생겼는데 호기심에 기웃거렸다가 선수로 활동하게 됐다. '테니스를 하지 않았으면 어떤 일을 했을 것 같냐'는 질문에 "대학교를 제대로 갈 수 있었을까요(웃음).손재주는 좀 있는 것 같아요.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으니까 스포츠 관련 분야에 종사하지 않았을까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세계 랭킹 200위권에서 맴돌던 이형택은 198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군 면제를 받은 뒤 '메이저대회 도전'이라는 새 목표를 세웠다. 그는 "군대 문제가 해결된 데다 해외 진출을 독려한 삼성증권의 후원이 있어서 시야를 세계무대로 돌렸다"고 말했다. 이형택은 세계무대에서 전인미답의 길을 걸었다. 메이저대회인 US오픈 16강에 두 번(2000 · 2007년)이나 진출했고,미프로테니스(ATP) 투어랭킹이 36위까지 올랐다. 2003년 호주 시드니에서 벌어진 아디다스컵 결승에서 당시 세계 4위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스페인)를 꺾고 한국인 최초로 ATP투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는 샘프러스와 맞붙은 2000년 US오픈 16강전에 대해 "졌지만 기분 좋았다. 세계 1위 선수와 맞붙어 자신감이 붙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달 말 가족과 함께 춘천으로 이사할 예정이다. 세 살 난 아들과 네 살배기 딸이 테니스를 배우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애들한테 테니스와 골프는 꼭 시키고 싶어요. 가족이 다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이잖아요. 또한 비즈니스 등 사회생활에도 유익하니까요. "

그는 2005년 미국 투어 도중 클럽을 대여해 골프라운드에 나섰다. 물론 한 번도 연습장에 가지 않고 겁 없이 골프에 도전한 것."외국 선수들은 시합의 중압감을 골프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통해 풀더라고요. 멋모르고 골프를 시작했는데 첫 라운드에서 볼이 잘 맞았어요. 볼을 끝까지 보고,치는 순간 힘을 주는 원리는 비슷한 것 같아요. "

테니스를 잘치는 그만의 비법은 뭘까. 특별한 게 없단다. 테니스는 감각 운동이기 때문에 연습을 많이 하는 것밖에 왕도가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동호인이 테니스를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는 US오픈 16강에 진출하는 등 전성기에 버금가는 성적을 낸 2007년을 회고했다. "코트에서 상대방을 이기기보다 더 많이 뛰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대회에 임했어요. 마음을 편하게 하니까 더 좋은 샷이 나왔고 세계 랭킹도 36위까지 뛰었어요. "

그는 후배들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요즘 후배들이 세계 '톱10'처럼 목표의식은 높아졌지만 교육 시스템이 열악하고 대회수가 적다고 핑계 대는 경우가 많아요. 환경이 어떻든간에 선수 스스로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자신감과 도전의식이 뒷받침돼야 해요. 힘들고 어려우면 금방 포기하는 선수를 보면 안타깝죠."

춘천=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