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갑자기 먹통이다. 그 순간 TV 앵커는 다급한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모든 컴퓨터로 확산되고 있다고 말한다. 출근길은 교차로마다 교통 신호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회사에 가 보니 인터넷 접속도 되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송금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사내 전산망이 마비돼 사실상 업무도 볼 수 없게 됐다.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신종 플루를 바라보면서 영화 속 시나리오 같은 우려가 머리를 스쳤다. "디지털 세상에도 신종 플루 같은 디지털 바이러스나 사이버 재난이 닥친다면…." 실제로 바이러스나 디도스 공격만으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진 적이 있다. 2003년 2월 약 300만명이 피해를 입은 플로리다주 남부의 정전 사태는 컴퓨터 해킹이 원인이었다. 같은 해 8월,5000만명가량이 피해를 입은 미국 동부 일원과 플로리다주 일대의 대규모 정전 사태의 원인 역시 바이러스 공격이라는 발표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3년 1 · 25인터넷 대란과 올해 발생한 7 · 7 디도스 공격이 있었다.

우리는 '인터넷 만능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비트나 바이트 의존도가 높을수록 위험에 대한 노출도 역시 커져가고 있다. 인터넷 시대의 미래를 '디스토피아(Dystopia)'로 비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얼마 전 개봉된 '터미네이터 4'의 시나리오는 인간이 만든 컴퓨터가 오히려 인간을 지배한다는 암울한 내용이었다. '이글 아이(Eagle Eye)'라는 영화는 휴대폰,현금지급기,CCTV 등 주변의 전자장치와 시스템이 인간의 행동을 조종하는 또 다른 눈(eye)이라고 우려했다. 우리는 신종 플루나 해킹,디도스 공격 등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이들을 그저 SF 영화로만 볼 수 없게 됐다.

정보기술(IT)업계의 유명한 논쟁꾼인 니컬러스 카는 저서 '빅 스위치'에서 "인터넷은 지식과 문화를 즉흥적,주관적,임시적으로 접근하게 만들어 급기야 얇고 평평하게 퍼진 '팬케이크 인간'을 양산한다"면서 "그 끝은 우리가 믿고 싶지 않은 괴담-인간은 컴퓨터에 종속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회피할 수 없는 논쟁거리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디지털 기술이나 인터넷은 인간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디지털시대에 노출된 극단적인 위험들,그리고 인간성 상실과 소외 같은 책이나 영화 속의 암울한 시나리오의 현실화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가 필요하다.

디지털 세상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그 도구들은 인간의 행복을 담고 전하는 도구가 돼야 한다. 인간을 위한,인간에 의한,인간의 디지털 세상만이 가치를 지닐 뿐이다. 우리 스스로가 디지털 세상을 생산적인 공간,안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방심할 경우 우리는 왜곡된 디스토피아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팬케이크 인간' 괴담의 현실화는 막아야 한다.

김희정 < 한국인터넷진흥원장 khjkorea@kis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