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공평동의 한 빌딩에 마련된 KBS 수목 드라마 '아이리스'(연출 김규태 · 양윤호) 촬영 현장.서울 한복판에 핵폭탄을 터뜨리려는 북한 테러단의 비밀 기지가 꾸며져 있다. 원래 국정원 산하 조직인 국가안전국(NSS) 요원이었던 김현준(이병헌 분)은 상사인 백산 부국장(김영철 분)으로부터 버림받자 복수를 위해 테러단에 가담한다.

"레디~ 액션!"

양윤호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배우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연기를 시작한다. 테러단의 리더 강도철(장동직 분)이 단상에 서서 현준과 김선화(김소연 분)를 포함한 전 대원들에게 작전 명령을 하달한다. 특히 현준에게는 테러단에 붙잡힌 현준의 옛 연인이자 NSS 요원인 최승희(김태희 분)를 직접 심문해 보안코드를 알아내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현준이 아무 말도 못한 채 굳은 표정으로 퇴장하자 도철은 곧바로 다른 부하 대원에게 보안코드를 알아내는 즉시 승희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배우들이 연기에 몰입한 순간에도 감독을 포함한 수십여 명의 스태프들은 조명,카메라 등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스태프 중 한 사람은 배우들의 연기를 조용히 관찰할 뿐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프리랜서 캐스팅 디렉터(Casting Director)인 최원우씨(34)다.

캐스팅 디렉터는 영화나 드라마의 배역에 적합한 배우를 찾아주는 직업.최씨는 대학을 졸업하던 2002년 연예계에 입문,8년째 캐스팅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아이리스' 외에도 '수상한 삼형제''다함께 차차차''천하무적 이평강' 등 KBS 드라마의 캐스팅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는 그를 공평동 촬영 현장에서 만났다.

▼캐스팅 디렉터는 어떤 일을 하나요.

"잘 모르는 분들은 캐스팅 디렉터라고 하면 '길거리 캐스팅'을 많이 떠올리더라고요. 길거리에서 무턱대고 명함을 주면서 '스타가 되고 싶으면 연락해~' 하는 식의 상상을 하는데 사실 그건 연예기획사에 소속된 매니저들이 회사 차원에서 스타로 키울 유망주를 찾으려고 하는 거예요. 엄밀히 말하자면 '캐스팅'이 아니라 '스카우팅(Scouting)'이죠."

▼캐스팅 디렉터를 하게 된 계기가 뭔가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뭘 할지 고민하다가 우연히 캐스팅 디렉터를 뽑는 구인광고를 봤어요. 그렇게 찾아간 곳이 당시 연기학원으로 유명했던 MTM이었는데 거기서 시작한 캐스팅 일을 벌써 8년째 하고 있네요. "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한다면서요.

"MTM에서 한 매니지먼트 회사로 옮겼다가 작년 여름부터 프리랜서로 독립했어요. 개인사업자로 등록하고 연예 기획사가 많은 강남에 작은 사무실도 하나 마련했지요. 집은 남양주인데,사무실은 강남이고 매일같이 들러야 하는 방송국은 여의도에 있어서 교통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요. "

▼'아이리스'는 어떻게 맡게 됐나요.

"'아이리스'는 제작사인 태원엔터테인먼트 측이 주인공을 정한 상태에서 제게 캐스팅 의뢰가 들어왔어요. 이병헌 · 김태희씨 등은 이미 출연키로 확정돼 있었죠.그래서 저는 그때까지 섭외되지 않은 나머지 주요 배역들을 캐스팅했습니다. '아이리스'는 점차 사라지고 있던 대형 스타의 '티켓 파워'를 되살려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죠.매회 시청률 30%를 넘을 만큼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데 이병헌이라는 대스타를 캐스팅한 게 주효했다고 보는 거죠."

▼어떻게 그 배역에 맞는 배우를 콕 집어내나요.

"직업적인 '감'이나 '눈썰미'라고 해야 할까요. 어떤 배우든 방송이나 영화 출연을 통해 구축해 온 나름의 이미지가 있는데 그 이미지를 시나리오에 대입해 보는 거죠.사실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지는데도 요즘은 뻔한 캐스팅이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서 쉬운 일은 아니에요. 또 적합한 배우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개런티나 배우의 개인적 취향 등으로 인해 성사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

▼평소 배우들을 많이 알아야 하겠네요.

"제 노트북에는 주연 · 조연급 남녀 배우 1000여명의 이름과 기본적인 신상 명세가 들어있어요. 또 해당 배우의 연기력,장 · 단점,개런티 수준 등은 항상 머릿속에 저장해 놓고 다녀요. 대본이나 시놉시스를 갖고 감독,작가와 기획회의를 할 때마다 '이 배우가 딱이네'하는 경우도 적지 않죠.사실 이 정도 하려면 오랜 경험과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저는 아무리 바빠도 아침 · 저녁마다 웬만한 드라마나 영화는 꼬박꼬박 챙겨서 봅니다. "

▼캐스팅 디렉터로서 보람을 느낄 때는요.

"제가 추천한 배우가 '대박'을 칠 때죠.작년에 방송된 KBS 드라마 '태양의 여자'에서 배경수 감독은 주인공인 신도영 역으로 톱스타 K씨를 원했어요. 하지만 저는 김지수씨를 쓰자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캐스팅이 이뤄졌죠. 최고 시청률이 27.3%를 기록할 만큼 드라마도 잘된 데다 김지수씨 역시 연말에 최우수 여자연기상을 받았어요. 또 최근 MBC 일일극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신세경씨도 제가 MBC 캐스팅 디렉터에게 추천해 성공한 경우죠.이럴 때마다 뿌듯함을 느낍니다. "

▼가장 힘든 점은 뭔가요.

"사실 캐스팅 디렉터는 공적이 잘 드러나지 않아요. 배우가 어떤 드라마에 출연해 크게 성공하더라도 공은 대부분 소속 기획사의 매니저가 가져갑니다. 정작 캐스팅 디렉터는 고맙다는 인사도 듣지 못할 때가 많은데 제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씁쓸하죠.하지만 그 덕분에 불신이 만연한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았는지도 모르겠네요. 감독과 제작사,기획사 모두 믿고 맡길 수 있는 캐스팅 디렉터가 절실하게 필요한데 앞으로 나서지 않고 오랜 기간 신뢰관계를 쌓아온 게 결국 제 자산이 된 것 같습니다. "

▼앞으로의 목표와 계획은요.

"기회가 닿으면 할리우드 대형 에이전시인 윌리엄모리스나 CAA와 같은 사업 모델을 국내에서도 시도해보고 싶어요. 지금의 연예기획사들은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영세한 데다 매니지먼트(연예인 관리)와 에이전트(계약,대외 홍보) 업무가 명확하게 구분돼 있지 않거든요. 앞으로 종합편성 채널이 등장해 콘텐츠 수요가 커지면 국내에서도 이 같은 선진 시스템이 정착될 수 있을 겁니다. "

글=이호기/사진=강은구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