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정치공동체가 살아남으려면 수많은 역경과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한다. 전쟁에서 패하기도 하며 주변국가에 의해 압제를 받을 때도 있다. 그런 일이 한 민족에게 벌어졌다면,뜻하지 않은 운명과 같은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 (Fortuna)'를 '유피테르(Jupiter)의 딸'이라 여기고 숭배했다. 그들은 인간사에 관한 위대한 권력을 '포르투나'에게 돌렸고,그 초상화를 그릴 때에도 변덕에 따라 돌아가면서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는 바퀴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가 일제에 의해 나라가 빼앗기리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구한말 정치인들 가운데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는 눈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게 된 것이 우리의 운명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있다. 주어진 운명이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정신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하면 살길이 열리게 마련이다. 이것은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아 입양된 아이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의 얄궂은 운명을 원망하기보다 자신을 길러준 부모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 성공하는 경우와 같다. 고대 로마인들도 진정한 정성과 덕,즉 '비르투(virtu)'를 가지면 운명의 여신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일제 35년간의 질식할 것만 같은 삶속에서도 우리는 질식하지 않고 살아남았고 그 후 피와 땀을 흘리며 공동체를 가꾼 보람이 있어 '나보란 듯이' 살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라는 과거를 없었던 것처럼 되돌릴 수는 없지만,치욕스러웠던 과거에 대해 통쾌하게 멋진 복수를 한 것이다. 해방 후 민족 내부가 분열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자유와 인권,민주주의가 보장되는 대한민국 정부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산업 황무지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조차 한국의 삼성과 같은 기업을 시샘하고 있을 정도다. 이제 이 정도라면 애국가에서 나오는 구절처럼,"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최근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은 느닷없이 식민지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배반자로 낙인 찍는 횡포를 부리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가 일본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군관학교에 들어간 후 독립군 진압작전에 나섰다고 주장하나,지금까지 그에 의해 피해를 봤다는 독립군은 없고,오히려 몰래 독립군을 도왔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 밖에도 김성수나 장지연의 경우처럼 몇 가지 행적을 들어 친일파로 고발한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걸 보면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사람들이 참으로 딱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나,정작 그들의 문제는 따로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피해자의 인권이 가해자의 인권에 비해 역차별되고 있다고 해서 자성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최근만 해도 '조두순 사건'으로 불려야 할 것이 한 동안 피해자인 '나영이 사건'으로 불린 경우처럼,미성년자 성폭력 사건에서조차 사악한 가해자가 아니라 죄없는 피해자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낙인 찍히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 때문에 공분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번 친일인명사전의 문제도 바로 그런 것이다. 일제가 강제로 유명 인사들에게 징병 권고문을 신문에 싣도록 하고 문인과 예술인들에게 강제로 친일작품을 내게 했다면,그것이야말로 창씨개명처럼 일제의 악랄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책임을 사악한 가해자인 일제에 묻지 않고 억울한 피해자인 우리민족에게 묻고 있으니,과연 제대로 된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들인가.

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