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한 父情 묻어나는 50년전 3형제 성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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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중재 前의원 부부 13년 기록 '사람은…' 출간
종구ㆍ종욱ㆍ종오씨 국회의원ㆍ교수ㆍ판사로 활동
종구ㆍ종욱ㆍ종오씨 국회의원ㆍ교수ㆍ판사로 활동
'세 아이 중에서 종구만 매를 무섭게 맞아본 탓인지 나를 너무 무서워한다. 내 잘못인 것 같다. 최대한 아이에게 자유를 주고 간섭을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1958년 2월2일)
6선 의원을 지낸 고 이중재 의원과 부인 고 최연진 여사의 일기 중 일부다. 이들 부부는 1958년부터 1970년까지 13년간 세 아들의 성장과정과 사회상을 담은 일기를 남겼다. 일기를 시작할 때 아홉 살,여섯 살,세 살이었던 꼬마들이 이제 국회의원과 교수,판사가 됐다. 이종구 한나라당 국회의원(60)과 이종욱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교수(57),이종오 사법연수원 교수(54)가 그 주인공.삼형제 모두 최고 명문인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리더가 됐다.
일기 속에는 아이들 키우는 재미가 담뿍 담겨있다. '종욱이는 재미있는 놈이다. 치과에 다녀오는 길에 빵을 앉은 자리에서 두 개나 먹었다. 그러니 힘이 셀 수밖에 없다. 형과도 맞상대를 하며 기어코 이기려고 한다. 결국에는 죽도록 얻어맞으면서도 악착같이 덤빈다. '(1958년 6월17일) '올해로 종오는 네 살이 되었다. 아침에 형제들끼리 노래자랑이 벌어졌는데 서슴지 않고 순서대로 나와 절을 꾸벅하고 노래하는데 아버지(남편)와 나는 질렸다. 모르는 노래가 없다. '(1959년 1월2일)
그러나 아이들이 커가면서 이 전 의원 부부는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가슴 졸일 때가 많았다. 특히 입시경쟁에 내몰린 어린 자식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사범부속국민학교에 시험을 치러 갔을 때 나는 이미 안될 것을 알았다. 종욱이도 조숙하고 능통한 놈이지만 다른 아이들도 지지 않을 정도로 꼬마 수재들이 모인 것 같았다. 아버지(남편)께서 처음 시작하는 아이에게 고배를 마시게 한 것 아니냐고 미안해 하신다. '(1960년 2월17일)
일기 곳곳에는 '종구는 어른스럽고 기억력이 좋고,종욱이는 사교적이어서 사업가가 됐으면 좋겠고,종오는 통찰력이 뛰어나 기대된다'며 세 아들의 소질과 적성에 맞게 교육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 전 의원은 세 아들이 결혼하자 며느리들에게 이 일기장을 건넸다. 남편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손자들의 교육에도 참고하란 뜻에서 였다. 그러나 이 일기장에는 명문대 보내는 교육비법 같은 건 없다. 자녀의 성격과 건강,성적을 고민하는 평범한 부모의 모습이 담겨 있을 뿐이다.
이종구 의원은 "선친은 우리 삼형제 중 당신을 닮은 장남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 위해 특히 내게 엄하셨다"며 "당신이 험난한 정치생활을 하셔서인지 내가 정치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고 말했다. 부자는 한때 국회 재경위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야당 의원으로 장관에게 질의하고,아들은 재경부 공무원으로 장관 답변서를 썼던 것."참 묘한 감정이 들었어요. 이때 선친께서 늘 강조하시던 '역지사지'의 의미를 절감했습니다. "
전남 보성 출신인 이중재 전 의원은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1963년 제6대 국회에 민정당(民政黨) 비례대표로 첫 등원했다. 이후 제15대 국회까지 6선을 기록하며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의 부인 고 최연진 여사는 정치인의 아내로 살며 남편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따뜻한 어머니였다.
이 의원은 이제 그리움이 된 부모의 반백년 전 텍스트를 모아 '사람은 따뜻한 시선으로 자란다'(메디치미디어)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다음 달 3일 오후 4시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열 계획이다.
최규술 기자 kyus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