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까지 고미술상 사이엔 이런 말이 돌았다. "정권이 바뀌면 시중에 없던 '물건'이 나온다. " 권력을 잡은 뒤 '있어 보이려' 직접 구입한 건지 누군가에게 선물이나 뇌물로 받은 건지는 알 길 없지만 정권이 교체되면 여기저기서 갖고 있던 고미술품을 내놓는다는 얘기였다.

실제 선거가 끝나고 6개월에서 1년쯤 지나면 한때 힘깨나 쓰던 누구누구네 집에서 옛그림이나 고려청자 등이 발견됐다고들 했다. 고미술의 인기가 덜해졌을까,유통경로가 너무 뻔해 부담스러워졌을까. 수시로 등장하는 TV드라마 속 미술품 로비는 전과 양상을 달리한다.

고미술품을 주고 받는 일은 거의 없고 현대미술품,그것도 현금화가 쉬운 유명작가 작품으로 승부하려 든다. TV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천재 의사 장준혁이 그림 좋아한다는 부원장에게 김기창 화백의 '바보 산수'를 보내는 게 그것이다. 무슨 일인지 부원장이 뇌물이라며 돌려보내지만.

미술품 로비의 새로운 유형은 또 다른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서 드러난다. 회사 실세인 김 이사 부인으로 갤러리 운영을 맡은 오 여사의 아마추어 작품을 직원 부인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사는 것이다. 황당한 작품 설명에 뒤로는 다들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앞에선 찬사를 퍼붓는다.

과장되긴 했지만 전혀 근거없는 얘기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들딸의 지도교수가 개인전을 열면 모른 체하기 어렵다는 학부형이 있고,거래 회사 대표를 비롯한 임원이나 권력자 가족의 전시회,혹은 그들이 추천하는 전시회 또한 외면하기 힘들다는 이들이 있는 게 현실인 까닭이다.

90년대 후반엔 내로라할 권력 실세의 딸이 서울 강남에 화랑을 냈고,유명 건설업체 대표의 맏딸과 둘째딸이 같은 건물 1,2층에 꽃집과 화랑을 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유명인사 가족이라고 전시회 개최나 화랑 운영을 못하란 법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형태로든 갑이 될 수 있는 경우라면 문제가 다르다.

국세청 안모 국장이 세무조사 편의를 조건으로 기업들에 부인이 운영하는 갤러리의 작품을 사도록 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전(前) 국세청장이 이전 청장에게 승진시켜 달라며 그림을 전했었다는 의혹도 있는 만큼 미술품 로비의 온갖 유형이 망라된 셈이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조사 결과 밝혀지겠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어이없고 기막히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