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거래소가 올초 전격 도입한 '상장폐지실질심사' 제도가 코스닥시장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투자자를 보호한다는 당초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경영진의 횡령·배임 사실을 숨기도록 하는 장치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제도는 코스닥 상장사는 임직원의 횡령·배임 혐의만 발생해도 해당종목의 거래를 정지하도록 돼 있다. 그 결과 소문만으로도 거래가 정지돼 투자자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속출했다. 그에 따라 코스닥 상장사들은 임직원의 횡령·배임 혐의가 발각돼도 공시를 하지 않고 대부분 쉬쉬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장폐지실질심사란 영업실적이나 거래량 부족 등의 '양적요건'을 충족하더라도 경영진의 횡령·배임 등 '질적요건'에 미달하면 심사를 거쳐 강제적으로 퇴출시키는 제도다. 이 제도는 작년 9월중순 새롭게 상장규정으로 개정된 뒤 지난 2월 4일부터 적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제도로 인해 임직원들의 횡령·배임 혐의 사실을 적발해도 공시하지 않고 숨기는 상장사는 유가증권시장이 아니라 코스닥시장 상장법인이다. 유독 코스닥에서 상장폐지실질심사 제도에 대한 지적이 나오는 이유는 양시장에서 제도가 각각 다르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래소에 따르면 코스닥 상장법인은 횡령·배임의 사실 확인에 앞서 혐의만 발생해도 거래를 정지시키지만, 유가증권 상장법인의 경우 법원으로부터 횡령·배임 사실이 최종 확인됐을 때까지 기다려 이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코스닥시장 상장법인 관계자와 투자자들은 적잖은 불만을 갖고 있다. 한 코스닥 상장법인 관계자는 "코스닥시장에서만 횡령·배임 혐의에 대해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납득하기 쉽지 않다"며 "횡령·배임 혐의가 드러나는 동시에 거래가 정지되는 것도 큰 피해지만, 이후 상장폐지 실질심사를 거쳐 상장이 유지되더라도 쏟아지는 매물로 주가급락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 경영진이 아니라 전 경영진이 벌인 횡령·배임에 대해서도 똑같은 규정을 적용하는 것도 문제다. 한 투자자는 "현 경영진이 회사를 인수했을 때 전 경영진의 횡령·배임 혐의를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전 경영진의 부정행위로 인해 현 경영진과 투자자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입는 것은 잘못된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상장사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경영진을 횡령·배임 혐의로 고소할 수 있는 것도 큰 문제로 꼽힌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악의를 갖고 코스닥 상장사 임원을 고소하면 해당 주식은 자동적으로 거래정지가 된다.

거래소는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일부 인정하면서도 상장폐지실질심사 제도의 보완 등 제도 정비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또 코스닥시장에서만 횡령·배임 혐의를 보다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은 그간 코스닥시장에서 횡령·배임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코스닥시장본부 관계자는 "대부분 코스닥시장에서 경영진들의 범법행위가 벌어지고 있어 유가증권시장보다 강력한 규제가 이뤄지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며 "횡령·배임 혐의는 시장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거래를 일단 정지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작년 9월부터 올 2월까지 6개월 동안 과거 횡령·배임 혐의에 대한 자진신고 기회를 이미 줬다"며 "주가하락을 우려해 지금껏 횡령·배임 사실을 숨겨온 상장사들에 대해 똑같은 규제를 적용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행 상장규정 세칙상 코스닥 상장사 직원이 횡령·배임을 했을 경우 그 규모가 자기자본의 5% 이상일 때 의무적으로 공시를 해야 하며, 임원은 금액에 상관없이 무조건 시장에 알려야 한다.

거래소는 횡령·배임을 저지른 경영진의 잘못은 언제든지 발각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상장폐지실질심사 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선의의 피해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제도다. 횡령·배임 혐의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질 경우에 거래소는 거래만 재개시키면 그만이지만 투자자들이 거래정지 기간동안 갖고 있는 주식을 현금화하지 못하고 입은 피해는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확인되지 않은 '루머'로 인해 회사 이미지가 추락할 대로 추락해도 거래소 측은 결국 배임 횡령은 드러나게 돼 있다며 상관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투자자가 선의의 피해를 입든, 코스닥 상장회사가 루머에 시달리든 말든 거래소는 이 제도를 계속 지키겠다는 이야기다. '코스닥 클린화'를 위해 시행되고 있는 제도가 시장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꼴이다.

한경닷컴 정현영 기자 j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