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국회의원인 L모씨는 최근 조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명의신탁을 통해 땅 투기를 한 사실을 낱낱이 공개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경부고속철도 개통을 앞두고 수혜 지역으로 꼽히던 천안시 모처에 땅을 구입한 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의 이름으로 등기했다. 명의신탁은 엄연한 불법 행위지만 장관을 지낸 데다 국회 진출까지 노리던 시기여서 본인 이름으로 투자하기가 꺼림칙해서였다.

그러나 부동산개발업에 종사하던 조카에게 이 땅의 매도를 위임한 것이 화근이 됐다. 사업이 어려워진 조카가 2004년 4월 땅의 일부를 판 뒤 매각 대금을 횡령했다. 돈을 갚으라고 여러차례 종용했지만 조카는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돈을 갚지 않고 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L씨는 최근 서울중앙지법에 돈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서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 명의신탁을 했다는 사실도 소장에 적었다.

이처럼 민사소송을 거는 사람이 자신의 불법 행위를 소장에 공개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판사들이 재판 과정에서 알게 된 불법 행위를 해당 관청에 통보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큰 걱정 없이 불법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소장을 통해 공개하는 범법 행위 가운데 일부는 일반인의 공분(公憤)을 살 만큼 충격적이다. 1990년대 말 대우그룹 계열사 사장을 지낸 J모씨는 그룹이 공중분해되면서 분식회계에 대한 민 · 형사상 책임을 질 가능성이 높아지자 재산을 아들에게 넘겼다. 그는 자신 명의로 돼 있던 서울시내 아파트와 지방의 토지 등을 처분해 현금으로 바꾼 뒤 퇴직금 등을 합쳐 아들 이름으로 된 증권계좌에 넣어둔 것.소액주주 360여명은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이겼지만(손해배상액 28억원) J씨 이름으로 된 재산이 없어 돈을 받을 수 없었다.

J씨의 작전은 여기까지는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국세청이 2007년 J씨 아들의 부동산 취득자금 출처를 조사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J씨가 아들 명의로 증권 계좌를 개설한 사실을 적발해 낸 것.국세청은 J씨에게 7억원에 달하는 증여세와 가산세를 부과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J씨 측은 "소액주주들에게 재산을 빼앗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재산을 빼돌렸을 뿐 증여를 한 것은 아니다"며 국세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물론 승소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돈을 아들 이름으로 돌린 과정을 소장에 자세히 적었다.

부동산 투기를 위해 집단적으로 불법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법원이 눈을 감는 사례가 많다. 거래가 금지된 입주권이나 분양권을 매매하면서 가처분신청이 예외 없이 동원되지만 법원은 가처분신청을 받아주고 있다. 예를 들어 서울시 산하 SH공사의 입주권을 구입한 사람은 원주민이 입주권을 이중으로 파는 것을 막기 위해 처분금지 가처분신청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입주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처분을 신청하는 것 자체가 전매가 금지된 입주권을 매매했다고 자수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법원은 모른 척하고 있다.

부동산 전문인 최광석 변호사는 "초기에는 적발 위험 때문에 눈치를 보다가 별다른 불이익이 없자 너도나도 가처분신청을 하기 시작했다"며 "그 결과 가처분신청이 불법 거래의 안전판 역할을 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법원 차원에서 재판 과정 중 알게 된 불법 행위를 해당 관청에 통보하라고 강제하는 규정은 없다. 다만 예외적으로 대법원 예규는 부동산 명의신탁 사건에 대해서는 판결을 내린 후 2주 안에 국세청 등에 통보하도록 하고 있다. 그렇지만 예규를 지키는 판사는 드문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 행정처의 한 판사는 "판사들은 번거로움 때문에 불법 행위 고발에 소극적이며 부동산 명의신탁 사건도 국세청 등에 통보하게 되어 있지만 의무 조항이 아니어서 실제로 지키는 판사는 찾아보기 어렵다"며 "이런 사정을 변호사를 통해 알게 된 원고들은 소장에 불법 사실을 명시하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성근 기자 trut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