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꿈' 만든 모하메드…'현실의 파도' 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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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탈출 리더십 보여주나 세계가 주목
두바이 쇼크 이후 '개발 독재자' 불명예
두바이 쇼크 이후 '개발 독재자' 불명예
"오늘 대영박물관을 방문해 이슬람 미술품들을 감상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모든 무슬림들,특히 젊은이들이 이슬람 문화와 역사를 많이 공부하도록 독려해야겠다. "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최대 국영기업 두바이월드가 모라토리엄(채무상환유예)을 선언한 바로 다음 날인 지난달 26일 두바이의 에미르(통치자)이자 '두바이 신화 창조의 주역'으로 유명한 셰이크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60 · 사진)이 자신의 트위터 홈페이지(http://twitter.com/HHShkMohd)에 남긴 메시지다. 그의 트위터만 봐선 '두바이발 금융쇼크'로 세계 금융시장이 일대 혼란에 빠졌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다.
셰이크 모하메드의 트위터는 '자유로운 상상을 강조하는 감각적 리더십'과 '중동국가 왕족 특유의 보수적 폐쇄성'이라는 이중적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감한 경제개방을 추진해온 셰이크 모하메드는 다른 중동국가 왕족들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신세대적 이미지를 자랑해왔다.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인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직접 운영하며 각각 10만5400명,19만8100명의 누리꾼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두바이 쇼크와 관련해 에미르로서의 입장은 두 사이트에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다.
'모든 꿈을 현실로 만든 지도자' '사막의 현자' 등 화려한 수식어로 장식됐던 셰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 쇼크' 후 무분별한 차입경영으로 두바이 거품을 부른 '공상적 개발독재자'란 불명예를 안았다. 하지만 지금의 두바이를 있게 하기 위해 셰이크 모하메드가 그동안 걸어온 행보를 고려하면 두바이를 위기에서 구할 리더십을 갖춘 사람도 바로 그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0대 시절을 유럽에서 보내며 후계자 수업을 쌓은 셰이크 모하메드는 1971년 22세의 나이에 세계 최연소 국방장관 자리에 올랐고,왕자 신분이었던 1970년대부터 두바이 개발을 이끌었다. 1977년 두바이 국제공항 프로젝트를 완성했으며,1985년엔 에미레이트항공 출범과 제벨알리 자유무역지대 창설을 주도했다.
또 2001년엔 세계 최대 인공섬인 팜 아일랜드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고,2004년엔 세계 최고 높이 빌딩인 버즈두바이(818m) 착공에 들어갔다.
2006년 에미르에 오른 이후 집권 두 달 만에 두바이월드를 출범시키며 본격적으로 두바이의 경제성장을 진두지휘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주식회사 최고경영자(CEO)'로 불리며 두바이를 하나의 대기업처럼 운영했다.
그러나 '세계 최고,최대'에 대한 집착은 무분별하고 계획성 없는 건설 프로젝트의 남발을 낳았다. 그리고 셰이크 모하메드 자신의 판단에만 의존한 독단적인 스타일도 도마 위에 올랐다.
두바이의 부채가 늘어나면서 세계 금융계에선 이미 올초부터 셰이크 모하메드가 신뢰하는 참모 위주 '이너서클'만의 경영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27일 "두바이월드 사태로 그의 지도력이 의심받기 시작했다"고 전했고,월스트리트저널(WSJ)도 "폐쇄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는 나라에 투자할 때는 두 배로 신중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최대 국영기업 두바이월드가 모라토리엄(채무상환유예)을 선언한 바로 다음 날인 지난달 26일 두바이의 에미르(통치자)이자 '두바이 신화 창조의 주역'으로 유명한 셰이크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60 · 사진)이 자신의 트위터 홈페이지(http://twitter.com/HHShkMohd)에 남긴 메시지다. 그의 트위터만 봐선 '두바이발 금융쇼크'로 세계 금융시장이 일대 혼란에 빠졌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다.
셰이크 모하메드의 트위터는 '자유로운 상상을 강조하는 감각적 리더십'과 '중동국가 왕족 특유의 보수적 폐쇄성'이라는 이중적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감한 경제개방을 추진해온 셰이크 모하메드는 다른 중동국가 왕족들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신세대적 이미지를 자랑해왔다.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인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직접 운영하며 각각 10만5400명,19만8100명의 누리꾼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두바이 쇼크와 관련해 에미르로서의 입장은 두 사이트에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다.
'모든 꿈을 현실로 만든 지도자' '사막의 현자' 등 화려한 수식어로 장식됐던 셰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 쇼크' 후 무분별한 차입경영으로 두바이 거품을 부른 '공상적 개발독재자'란 불명예를 안았다. 하지만 지금의 두바이를 있게 하기 위해 셰이크 모하메드가 그동안 걸어온 행보를 고려하면 두바이를 위기에서 구할 리더십을 갖춘 사람도 바로 그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0대 시절을 유럽에서 보내며 후계자 수업을 쌓은 셰이크 모하메드는 1971년 22세의 나이에 세계 최연소 국방장관 자리에 올랐고,왕자 신분이었던 1970년대부터 두바이 개발을 이끌었다. 1977년 두바이 국제공항 프로젝트를 완성했으며,1985년엔 에미레이트항공 출범과 제벨알리 자유무역지대 창설을 주도했다.
또 2001년엔 세계 최대 인공섬인 팜 아일랜드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고,2004년엔 세계 최고 높이 빌딩인 버즈두바이(818m) 착공에 들어갔다.
2006년 에미르에 오른 이후 집권 두 달 만에 두바이월드를 출범시키며 본격적으로 두바이의 경제성장을 진두지휘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주식회사 최고경영자(CEO)'로 불리며 두바이를 하나의 대기업처럼 운영했다.
그러나 '세계 최고,최대'에 대한 집착은 무분별하고 계획성 없는 건설 프로젝트의 남발을 낳았다. 그리고 셰이크 모하메드 자신의 판단에만 의존한 독단적인 스타일도 도마 위에 올랐다.
두바이의 부채가 늘어나면서 세계 금융계에선 이미 올초부터 셰이크 모하메드가 신뢰하는 참모 위주 '이너서클'만의 경영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27일 "두바이월드 사태로 그의 지도력이 의심받기 시작했다"고 전했고,월스트리트저널(WSJ)도 "폐쇄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는 나라에 투자할 때는 두 배로 신중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