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대놓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나 '은따(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가 아닌 김 과장,이 대리들의 12월 다이어리에는 송년회 일정이 빡빡하게 적힌다. 직장단위도 많고 친구 등 개인단위도 많다. 문제는 송년회가 단순히 참석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들에게 기죽지 않을 만큼 마시면서도 다음 날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멈추는 절도가 필요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오버'를 금해 분위기를 깨는 것도 삼가야 한다. 자칫했다간 건배구호로 '원더걸스(원하는 만큼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걸맞게 스스로 마시자)'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소녀시대(소중한 여러분들 시방 잔대보자)'를 반복할 수 있는 게 김 과장,이 대리의 송년회다.

◆송년회 손자병법

연말이 되면 송년회 20여개를 챙겨야 한다는 식품회사 영업맨 성모 과장(35).맡은 일이 영업이다 보니 하루에도 여러 차례 송년회에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성 과장은 분위기를 깨지 않고 술 적게 마시는 법,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는 법,취하지 않고도 분위기 띄우는 법 등을 터득했다. 그는 "송년회에 1시간30분쯤 늦게 가면 참석자들이 이미 좀 취해 있는 상황"이라며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자발적으로 세 잔을 연속으로 마시는 '후래자 삼배'를 하면 욕도 먹지 않고 술도 적게 마실 수 있다"고 귀띔했다.

그렇지만 상황이 모두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어쩔 수 없이 술을 많이 마셔야 할 상황에 맞닥뜨리는 게 송년회 자리다. 성 과장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참석자 중 가장 술이 센 사람을 지목해 1 대 1로 '맞짱'을 뜨는 게 최선"이라고 조언했다. 초장에 장렬히 '전사'하는 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데 안성맞춤이라는 경험에서다.

◆술은 싫다…이색 송년회

목소리 전문병원인 서울 예송이비인후과의 송년회는 특이하다. 무조건 커플을 동반해야 한다. 미혼에다 애인도 없는 직원들은 한 달 전부터 애인(또는 파트너)을 물색하느라 부산을 떤다. 옷차림도 평소와 달라야 한다. 만화 캐릭터 복장을 하거나 희한한 분장을 해야만 송년회장에 들어갈 수 있다.

하이라이트는 막간에 진행되는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자는 뜻)' 프로그램.평소 사용하지 않는 물건 세 가지를 갖고 와 추첨이나 경매를 통해 새 주인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다. 병원 측은 "좋은 물건을 차지하기 위해 왁자지껄하게 경쟁하다 보면 술도 깨고 시간도 알차게 보낼 수 있어 모두 만족해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 강남권에 위치한 한 외국계 회사의 송년회는 직원들이 가장 기다리는 연중 행사다. 송년회 장소는 서울에서 가장 잘나가는 유명 레스토랑.전 가족을 의무적으로 동반해야 한다. 송년회 특징은 모든 것을 최고로 준비한다는 점이다. 장소뿐만 아니라 음식,와인,선물 등 행사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최고로 준비해 임직원의 가족들 입에서 탄성을 자아낸다.

이 회사에 다니는 이모 과장(33)은 "평소 말로만 듣던 고급 레스토랑에서 열리는 송년회에 참석한 가족들이 '아,우리 아빠(남편)가 엄청 훌륭한 회사에 다니는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색 송년회는 무슨?

그렇다고 이색 송년회가 모두에게 환영받는 건 아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과장(36)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 분위기만 가라앉았던 작년 송년회만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온다. 이른바 '웰빙 송년회' 추세에 따르기 위해 김 과장 팀은 영화를 함께 보는 것으로 송년회를 준비했다. 영화를 본 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시자는 게 당초 계획이었다.

그러나 젊은 연인들이 가득한 패밀리 레스토랑에 넥타이 부대들의 등장 자체가 NG였다.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엔 팀원들 간 대화도 단절됐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부장이 "3차 가자"는 말을 꺼냈을 때 팀원들 모두 환호성을 질러댔다. 술자리는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김 과장은 "올해는 팀원 누구도 웰빙 송년회라는 말을 입에 담지도 않는다"며 웃었다.

◆송년회 하다 골병 들라

많은 직장인들은 사적인 송년회와 공적인 송년회에 두루 참석한다. 회사일 때문에 꼭 가야 하는 공적인 송년회는 부담스러워도 오랜만에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편안하게 즐기는 사적인 송년회는 인기가 많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부익부 빈익빈이다.

대학 졸업 후 거의 10년 동안 크리스마스 즈음에 대학 동기 송년회를 주도해온 '골드 미스' 최모씨(33)는 요즘 분통이 터진다. 졸업한 지 2~3년 지났을 때만 해도 친한 친구 8명이 참석하는 모임을 주선하는 건 수월했다. 다들 솔로 생활의 애환과 갓 입사한 직장에서 겪는 애로사항을 털어놓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금은 다르다. 친구들 절반 이상이 결혼했다. 회사 송년회만으로도 피곤하다는 친구도 많다. 미혼인 친구들도 데이트에 열을 올리거나 동호회 등에 참석하느라 친구들 송년회를 마뜩지 않아 하는 눈치다. 최씨는 "10년 전 인연을 맺은 친구들과의 송년회에 나만 목을 매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말했다.

◆'오바마''진달래'…

대기업에 다니는 박모 과장(35)은 얼마 전 동문 송년회에 참석했다가 까마득한 선배가 외친 건배구호를 잊을 수 없다. 50세가 넘은 선배는 술잔을 들고 "구구팔팔일이삼사"라고 외쳤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면서 일하다가 이틀만 아프고 3일째 죽자'는 의미란다. 박 과장은 아직 그 의미가 몸에 와 닿지 않았지만,나이 든 선배들은 "맞아,맞아"를 연발했다.

송년회 때의 건배구호도 시류를 반영한다. 작년 삼성경제연구소는 '올해의 건배구호'로 '하쿠나 마타타'를 정했다. '걱정하지마 다 잘될거야'라는 뜻의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아 불안감을 반영한 구호였다. 올 송년회의 건배구호는 복고풍이다. 경제위기 끝자락인 탓인지 '오바마(오직 바라고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기를)'류의 구호가 많이 회자된다.

평소 술자리에서 외쳐지던 '당신멋져(당당하게,신나게,멋지게,져주며 살자)'라거나 '진달래(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라는 구호도 많이 들린다. 친한 친구나 동문들 사이에선 '오징어(오래도록 징그럽게 어울리자)'라는 건배사도 나타난다. 직장단위 송년회에선 '개나리(계급장 떼고 나이는 잊고 리랙스하자!)'라는 구호가 들리기도 한다. 어떤 구호를 외치거나 좋은 기억은 살리되 나쁜 기억은 잊고 새해를 맞이하자는 직장인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이고운/이정호/이관우/김동윤/정인설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