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장에 먼저 진입한 기업이 '선발기업의 이점(first mover advantage)'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업계의 오랜 정설이다. 선발기업인 제록스와 애플은 기술 혁신과 시장 선점을 통해 복사기와 PC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야말로 기업이 생존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최선의 전략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런던경영대학원의 마르키데스 교수 등은 이 같은 믿음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즉 신시장을 지배하는 기업은 가장 먼저 시장에 진출한 기업이 아니라 적절한 시점에 움직인 재빠른 2등 기업이라는 것이다. VCR는 미국의 암펙스가 가장 먼저 제품을 출시했지만 정작 시장은 일본 JVC가 지배했다. 독일의 라이카는 35㎜ 카메라시장을 개척했지만 대중적 시장을 지배한 것은 일본의 캐논과 니콘이었다.

물론 저자들이 최초 진입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비자들의 습관에 중요한 변화가 있거나 기존 기업역량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 혁신'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개척자가 반드시 지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TV,VCR,복사기,자동차,반도체,휴대폰 등은 근본적 혁신을 통해 창조된 시장의 좋은 예들이다. 그런데 이들 산업의 역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시장을 개척한 기업보다는 대중시장을 창출한 기업들이 지배자로 등극했다. 느린 2등은 경쟁에서 실익이 적다. 하지만 최적의 타이밍을 찾아 자신의 제품을 업계 표준으로 만드는 재빠른 2등은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

재빠른 2등 전략은 창의적인 신생기업보다는 공룡이나 코끼리에 비유되는 기존 대기업들에 더 많은 시사점을 준다. 마르키데스 교수는 대기업이 신생기업의 창의성이나 도전정신을 완벽하게 갖추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신시장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역량과 틈새시장을 대중시장으로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역량은 서로 다르다. 기존 대기업은 작은 시장들을 통합하고 확대하는 데 강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대기업은 새로운 시장의 개척자가 되기보다는 재빠른 2등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물론 재빨리 움직이기 위해서는 많은 사전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또 다른 상식이다.

이동현 가톨릭대학교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