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이 두바이유에도 따라잡히며 20년 넘게 지켜온 국제유가 기준가격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8일 WTI가 북해산 브렌트유는 물론 중동산 두바이유보다도 낮은 수준에서 거래되는 가격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WTI 가격이 브렌트유 가격을 밑돈 것은 이미 올초부터 자주 나타났었다. 지난 2월에는 그 격차가 배럴당 12달러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WTI 최근월물은 7일 뉴욕상품거래소(NYMEX)에서 1.54달러 떨어진 배럴당 73.93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76.43달러에 마감된 브렌트유 최근월물과 가격 격차는 2.5달러로 3개월반 만에 최대로 벌어졌다.


WTI는 브렌트유뿐만 아니라 두바이유보다도 낮은 가격에서 거래되고 있다. 이날 최근월물 기준으로 두바이유는 배럴당 78.18달러로 WTI보다 4.25달러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두바이유와 브렌트유 사이의 가격차이를 측정하는 브렌트-두바이 스와프 선물교환지수는 -0.66달러로 5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두바이유가 더 비싸진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이례적이다. WTI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브렌트유보다 평균 1~2달러,고유황 중질유인 두바이유보다는 5달러가량 높은 가격에 거래돼 왔다.

미국 텍사스주 서부와 뉴멕시코주 동남부에서 생산되는 WTI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고 유황함량이 낮은 저유황 경질유로 품질이 뛰어나다. 또 NYMEX가 1980년대 초 WTI를 기준원유로 채택하면서 WTI는 전 세계 원유거래의 기준가격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 WTI의 약세에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인 아람코는 내년부터 미국에 판매하는 모든 원유에 대한 기준가격으로 미 멕시코만에서 생산되는 고유황 원유가격을 반영한 '아거스 고유황원유지수(ASCI)'를 적용하겠다고 밝혀 WTI의 위상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처럼 가격이 역전된 것은 수급변동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경기회복세가 가파른 아시아 지역에서 원유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반면 유럽과 북미 등 기존 원유 소비대국에선 수요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또 중동 산유국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이 잘 이뤄지고 있는 것도 두바이유의 강세에 힘을 보태고 있다. 고유황 중질유를 주로 생산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하루 950만배럴에서 820만배럴로 생산을 줄였다.

소시에테제네랄의 마이클 위트너 원유연구 글로벌 책임자는 "OPEC의 감산으로 두바이유와 같은 저품질 고유황 원유의 가격이 브렌트유나 WTI와 같은 고품질 원유보다 높게 유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상황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해외석유동향팀의 이재형 대리는 "세계경기 회복이 본격화할 때까지 OPEC의 감산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고 아시아 지역의 석유 수요는 상대적 강세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 · 중 · 일 3국의 중동산 두바이유 의존도가 약 74%(2008년 기준)인 것을 감안하면 두바이유의 가격 강세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 석유화학업계의 비용 증가로 이어질 우려가 적지 않다.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