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성병 연구위해 스스로 매독균 주사…온몸 던진 '전설의 의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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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스 셔윈 눌랜드 지음 | 안혜원 옮김 | 살림 | 740쪽 | 2만5000원
1844년 12월 어느 날 밤 미국 코네티컷주에 사는 치과의사 호레이스 웰스가 아내와 함께 '웃음 가스 쇼'를 관람했다. 이 공연은 아산화질소와 에테르 증기를 이용해 기분을 붕 뜨게 하는 일종의 환각 파티였다.
공연 중 지원자 한 사람이 나섰다. 그는 웃음 가스에 취해 있는 동안 나무 의자로 다리를 맞았지만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웰스도 자원했다. 그 역시 피가 날 정도로 다쳤지만 이산화질소 효과 덕분에 아픈 줄 몰랐다. 그는 곧바로 치과로 돌아와 동료에게 '내가 가스 냄새를 맡고 잠든 사이에 내 어금니를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고통 없이 한숨 자고 일어난 그는 환호성을 울렸다. "아,발치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는 이산화질소 제조법을 배워 한 달 새 15차례나 무통 발치에 성공했다. 이듬해 2월 보스턴으로 간 그는 예전 학생이자 잠깐 동업했던 윌리엄 토머스 그린 모튼의 소개로 메사추세츠종합병원 외과의사들 앞에서 공개실험에 나섰다. 그러나 실수로 가스 자루를 너무 일찍 물렸고 무통 수술은 실패하고 말았다. 크게 낙담한 그는 정신적 상처와 절망에 시달리며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이때 야심만만한 모튼은 별도로 연구를 지속했고 2년도 안 돼 무통수술의 성공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사흘 후 그는 웰스에게 편지를 써 에테르로 마취에 성공했고 이를 실용화하려 한다고 통보했다. '최초의 마취'라는 타이틀을 빼앗긴 웰스는 마취술을 먼저 발명했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썼으나 의학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튼 역시 그에게 조언을 해줬던 화학 스승 잭슨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그가 특허권과 경제적 이익을 따져보느라 동분서주할 때 잭슨은 공을 자신에게 돌리려 의회와 학계를 대상으로 작업을 벌였다. 결국 모튼은 일생의 대부분을 잭슨과의 분쟁으로 보낸 뒤에야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아산화질소 마취를 발명한 웰스를 최초로 마취 기체 발견자로 인정하는 분위기도 퍼졌다. 하지만 그것은 웰스가 강력 범죄로 감옥에 갇혀 자살한 직후의 일이었다. 2500여년에 걸친 의학사에서 전신마취의 탄생 과정은 이처럼 명예와 야망,돈과 속임수가 얽힌 드라마 같은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내셔널북어워드 수상자인 셔윈 눌랜드 예일대 교수는 《의학사》에서 세상을 뒤바꾼 의학실험 15장면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최초의 무통 수술 이후 40년 뒤 코카인의 국소마취 효과가 의학계를 흥분시켰다. 미국 의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윌리엄 홀스테드도 동료들과 함께 국소침윤마취기술법을 연구했다. 피실험자는 그들 자신이었다. 연구를 하는 동안 이들은 코카인에 기분을 들뜨게 하는 효과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날마다 코카인가루를 들이마셨다. 실험을 위해 친구들도 집으로 초대했다. 그 연구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은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컸다. 코카인에 중독된 것이다. 이후 홀스테드는 평생 동안 코카인과 모르핀 중독으로 고생해야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업적과 명예를 놓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대부분의 의사들이 요즘처럼 부를 누리지 못하던 시절 온몸을 던져 의학을 발전시키려 애썼던 주인공이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시체 애호가'라는 욕을 먹으면서 수십년간 해부에 집착한 끝에 해부학 고전을 썼고,존 헌터는 성병 연구를 위해 매독과 임질에 걸린 환자의 균을 자신에게 주입해 3년간 고름과 통증을 분석했다.
질병을 인체의 균형이 깨진 것으로 보고 환자에 대한 의사의 책임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히포크라테스학파와 환자의 말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진단해야 합리적인 치료가 가능하다며 청진기를 발명한 르네 라에네크.생명과 질병의 기본 단위가 세포임을 발견한 루돌프 피르호.전쟁터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며 '온화하게 치료하라'는 외과의 사상을 확립한 앙브로아즈 파레.소독 무균 수술로 환자들을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구한 조지프 리스터….
연륜 있는 외과의사의 눈으로 인류 의학사의 거대한 물줄기와 샛강의 움직임까지 입체적으로 조명한 명저다. 황상익 서울대 의사학교실 주임교수가 감수했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