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얼어붙었던 국내 자금시장이 풀릴 기미를 보이면서 국내 증시에서 '핀볼 효과'에 대한 기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이론적으로 특정 국가에서 '돈맥경화' 현상이 풀리는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가 통화유통속도와 통화승수다. 통화유통속도란 일정기간 동안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통화유통속도가 회복된다는 것은 얼어붙었던 돈이 돌기 시작하면서 그 나라 경제가 활력을 되찾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분기 0.687로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던 통화유통속도가 2분기 0.704,3분기 0.709 등으로 회복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절대수준은 여전히 낮지만 하락추세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국민들의 현금보유에 따른 기회비용이 증가함에 따라 투자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단적인 예가 금융위기 이후 한동안 기피대상이었던 'BBB' 신용등급의 회사채 발생이 활기를 띠고 있는 점이다. 작년 4분기 200억원 수준까지 위축됐던 이 시장이 올 4분기엔 2조원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우량기업과 특정 계층에만 쏠리던 시중의 돈이 퍼지기 시작하고 투자자들의 성향도 보다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뒷받침해 주는 대목이다.

증시가 한 나라 경제의 실상을 반영하는 얼굴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최근처럼 돈이 돌기 시작하면 낙관론이 고개를 든다. 연말연시가 다가오면서 국내 증시에서 '산타랠리''1월 효과'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것도 이 이유에서다. 주목되는 것은 외국인을 중심으로 내년 한국 증시에서 '핀볼 효과'가 나타날 수 있지 않느냐는 기대가 형성되고 있는 점이다.

핀볼 효과란 제임스 버크의 명저에서 나온 이름으로 사소한 사건이나 물건 하나가 도미노처럼 연결되고 점점 증폭되면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어 내는 현상을 뜻한다. 이를 증시에 적용하면 각각의 볼링핀에 해당하는 주가 결정요인인 경제성장과 유동성 기업실적 투자심리 등이 우호적으로 예상돼 주가가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국내 증시의 가장 큰 볼링핀에 해당하는 경기는 일부에서 '더블 딥'을 우려하는 시각이 여전히 있으나,대부분의 예측기관들은 내년에도 회복세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특히 해외 예측기관들은 내년 한국경제 성장률을 평균 5% 내외로 잠재수준을 웃돌 것으로 보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5.5%로 가장 높게 잡고 있다.

경기와 함께 또 하나의 볼링핀인 유동성을 보면 최소한 현 수준에서 크게 위축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연 2%인 현 기준금리는 테일러 준칙이나 피셔 공식으로 추정된 적정금리보다 최소한 2%포인트 정도 낮은 수준이다. 설령 한국은행이 출구전략의 일환으로 시중자금을 환수하더라도 감춰졌던 돈이 시중에 방출되기 시작하면 증시 주변자금은 불리할 것이 없다.

미시 측면에서 볼링핀에 해당하는 기업실적의 경우 정보기술(IT)이 주도하는 시대에 있어서는 업종별로 차별화 현상이 심해지겠지만 내년에도 여전히 개선될 여지가 남아 있다. 이 현상은 올해 기업실적에서 입증됐다. 수확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는 제조업과 달리 IT와 융합기술은 네트워크를 깔면 깔수록 생산성이 증대되는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밖에 각각의 볼링핀을 연결하는 힘에 해당하는 투자심리도 내년에는 비교적 밝은 편이다. 블룸버그가 조사한 내년 미국증시는 S&P지수 기준으로 올해보다 13% 정도 오를 전망이다. 또 국내 증시에 영향력이 높은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도 내년엔 4000~4500선까지 오를 것으로 보는 기관이 많다.

올해만큼 상승률은 크지 않겠지만 내년에도 증시는 나빠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핀볼 효과'가 나타난다면 내년엔 의외로 큰 장이 올 수도 있다. 다만 위기극복 과정에 있는 만큼 '두바이 쇼크'와 같은 '꼬리 위험'이 수시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유념해야 한다.

객원 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