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하나. '노털카찡떼'의 용도와 의미는? 정답은 폭탄주 슬로건이다. 폭탄주를 받으면 '(잔을) 놓지도 털지도 말고,카~하지도 찡그리지도 말며,(입을) 떼지도 말고 (마셔라!)'는 의미다. 폭탄주의 기본인 '평등'의 룰을 근엄한 '폭탄지도(爆彈之道)'로 슬쩍 진화시킨 위트다.

폭탄주는 1980년을 전후해 법조계와 고위 군 간부들 사이에서 시작됐다. 이후 언론계와 기업체 등으로 확산되다가 최근엔 김 과장,이 대리 같은 평범한 샐러리맨들 사이에서도 유행하고 있다. 연말을 맞아 직장인들의 송년회 자리에서 "말아 말아"를 외치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을 정도다.

폭탄주에 대해선 예찬론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혐오론이 훨씬 강하다. 술이 약한 사람에게 주량을 감안하지 않고 돌려대는 폭탄주는 술고문이나 다름없다. 폭탄주를 마시다보면 회식의 의미는 온데간데없고 술만 취하게 된다는 반론도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폭탄주는 '소맥' '막소사' 등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폭탄에 울고 폭탄에 웃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든 섞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비빔밥도 그렇고,폭탄주도 그렇고."

식품회사 해외영업 담당 정재분 과장(36)은 요즘 매일 한두 건의 송년회를 치르면서 '스스로가 참 많이 변했다'고 느낀다. '나중에 간부가 되면 절대 폭탄주를 돌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꼭 2년 전이다. 당시 정 과장의 별명은 '알분제(알코올분해효소 제로)'.술을 전혀 못 해서 붙은 별명이다. 송년회 때 치사량 이상의 폭탄주를 마셔 '비명횡사' 직전까지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2년 전 첫눈이 온 날 송년회의 기억은 '처참' 그 자체다. 한 시간 늦게 간 고교동문 송년회에서 폭탄주 다섯 잔을 마시고 기억을 잃었다. 화장실을 찾아 나선다는 게 그만 눈밭에 얼굴을 묻고 한 시간을 잔 것.그는 "같이 갔던 친구가 발견하지 못했으면 꼼짝없이 병원 신세를 져야 했을 것"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랬던 정 과장이 요즘 송년회 자리만 되면 '병권'을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폭탄 마니아로 변신했다. 지난해 일본 바이어를 상대로 한 영업에서 폭탄주 덕을 본 이후부터다. "식품 기초원료 수출을 위해 장시간 상담했는데,가격과 물량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마침 저녁시간이 돼서 술 한 잔 하러 갔는데,거기서 일본 바이어에게 '도미노주'를 선보였죠.맥주잔을 일렬로 세우고 그 위에 양주잔을 올려놓은 뒤 이마로 탁자를 내리쳐 만드는 폭탄주를 한 잔씩 돌리니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더군요. 크진 않지만 50만달러짜리 계약을 따내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

정 과장은 이후 폭탄주 예찬론자로 변했다. 그는 "단시간에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 수 있어 무엇보다 좋다"며 "한국에서 유행하는 다양한 폭탄주를 소개하면 외국 바이어들과도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폭탄주 대신 차라리 사약을 달라"

폭탄주 '안티(anti)파'도 적지 않다. 이들은 '폭탄주를 주느니 차라리 사약을 내려달라'고 주장한다. 취향과 주량을 고려하지 않은 막무가내형 폭탄 돌리기가 이들은 무엇보다 싫다. "앉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돌아가는 폭탄주 때문에 회식 자리에 아예 가기가 싫다"는 사람이 많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손문기 과장(39)은 평소 말수도 적고 점잖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하지만 팀원들 사이에서는 술자리 기피대상 1호로 꼽힌다. 취하기만 하면 테이블 위에 있는 모든 액체를 한곳에 붓는다. 이른바 '난지도주'다. 쓰레기를 모으듯 테이블 위 잔류물을 모두 섞어 폭탄주를 만든다. 양주 소주 맥주 등 술은 기본이다. 우유 탄산음료 등 모든 음료까지 섞는다. 술만 마시면 불같이 변하는 성격이라 화장실 핑계로 도망치는 것도 힘들다. 손 과장과 함께 일하는 한 직원은 "다음 주가 송년회인데 어떻게 빠져나갈지 벌써 고민"이라고 말했다.

중견 기업에 다니는 박모 대리(29)도 곧 다가올 부서 송년회만 생각하면 짜증이 치민다. 팀장의 '비위생적' 폭탄주 제조 습관 때문이다. 맥주잔에 소주를 부은 다음 굳이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젓는 게 팀장의 전매특허다. 문제는 그 숟가락과 젓가락이 이미 팀장의 입과 안주 사이를 무한 왕복 운동한 뒤라는 사실이다. 박 대리는 "무차별적으로 돌아가는 폭탄주 자리 자체도 싫지만,비위생적인 제조법은 더더욱 싫다"고 말했다.

◆진화하는 폭탄주

폭탄주도 시류를 탄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맥주와 양주를 섞은 '양폭'이 유행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수소폭탄주'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맥주잔에 양주를 따르고,양주잔에 맥주를 따라 독성을 몇 배로 높인 술이다. 폭탄주는 이후 '회오리주'와 '충성주(맥주잔에 젓가락을 놓은 다음 그 위에 양주잔을 올려놓고 머리로 술상을 쳐서 양주잔을 떨어뜨려 만드는 술)','타이타닉주(맥주잔에 빈 소주잔을 놓은 다음 소주잔이 가라앉을 때까지 양주나 소주를 부어 만드는 술)' 등을 거쳐 지금은 맥주와 소주를 섞은 '소맥'에 대권을 물려줬다.

소맥의 기원은 1996년 김영삼 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설(說)이 있다. 당시 한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국제수지 적자를 줄이려면 양주 소비를 줄여야 한다"며 "양주 대신 소주를 넣어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자"고 제안했다는 게 기원이라는 얘기가 돌아다닌다. 믿거나 말거나다. 소주 폭탄주는 작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계기로 급속히 유행하며 지금은 대세로 자리잡았다.

최근엔 막걸리 폭탄주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막걸리에 소주와 사이다를 섞은 '막소사'가 인기다. 웰빙주로 떠오르고 있는 막걸리를 활용한 폭탄주다. 골프 붐을 반영한 '골프주'도 나돈다. 폭탄주를 몇 번에 나눠 마시느냐를 따지는 게 특징이다. 네 번에 나눠 마시면 '파'고 세 번에 나눠 마시면 '버디' 식이다.

아무리 폭탄주를 좋아하는 주당이라도 문제는 '뒤끝'이다. 당일도 문제지만 다음 날 업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 증권사 과장은 "부서 연말 송년회 자리에서 폭탄주를 마셨는데 다음 날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며 "폭탄주가 분위기를 살리는 데 그만이라지만,군대도 아닌 만큼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양만 마시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관우/이정호/김동윤/정인설/이고운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