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감하기 위해 기획된 한 문학 콘서트에 초대를 받아갔다. '작가와의 대화'나'문학 낭독회'에서처럼 독자들로부터 항상 받는 질문 하나를 또 받았다. 예술가나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본 질문일 것이다. "창작할 때 영감은 어디서 얻으세요?"

소설가로 막 등단했을 때는 어디서 영감을 끌어와야 할지 몰라,무조건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거나 낯선 땅을 향해 여행을 떠나곤 했다. 하지만 작가 생활 15년이 가까워지자,쓸거리는 도처에 있으며,단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이런 식의 대답을 하면,그 평범함에 실망하거나 현실감이 없어 별로 수긍하지 않는 눈치다. 그럴 때는 친절하게 예를 들어주는 것이 좋다.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인쇄소에서 사용하던 다양한 서체와 크기의 한글 납 활자들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버려지게 되었다. 본래 납 활자들은 정해진 배열에 의해 언어학적 의미를 만들어내던 도구였으나,조각가 노주환씨는 폐품이나 다름없는 그것들을 수집하고 배열을 뒤섞고 이합집산시켜,조형적 형태의 아름다움으로 탈바꿈시킨 예술가로 유명하다.

들쭉날쭉한 납 활자들의 불규칙적인 배열로 서울의 지도,도시 풍경,한글 기둥 등 하나의 통일된 작품을 완성하거나,'시집'이나'다라니'경처럼 아예 한글표기 방식의 활자조합으로 조각품을 완성하는데,조형 작품 속에 살아 움직이는 한글 활자체의 생명력이 보는 이를 감동케 한다. 영감을 어디서 얻는가? 발상의 전환으로 버려진 것들 속에서 얻는다.

공장에서 나오는 레고나 완구들은 각이나 크기가 정해져 있어 학생들에게 반복적인 게임만을 제공할 뿐 창의력이나 유연한 사고를 키울 수 없다. 이런 고민에 빠져있던 수리과학창의연구소 박호걸 소장은 손에 들고 있던'빨대'를 이리저리 구부리다 고민의 해답을 얻게 되었다. 바로 도형의 꼭지점을 이어주는 연결대를'빨대'처럼 유연하게 만들면 접거나 자를 수 있어 해체나 재조립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한옥처럼 해체가 가능한 모형을 통해 창의성을 개발해보고 싶다던 오랜 소망과 맞닿은 것이었다.

플라톤의 입체라는 정다면체는 보통 다섯 가지 밖에 없지만,박씨의'빨대'(정식 명칭은 4d 프레임)를 사용하면 준정다면체(정다면체를 잘라만든 다면체)를 13개까지 만들 수 있어,11개를 만드는 미국을 능가한다고 한다. 이'빨대'는 유아교육과 과학과 미술 교육 그리고 치매노인을 위해서도 활용되고 있다. 영감을 어디서 얻는가? 빨대처럼 주변의 흔한 것에서 얻는다.

과거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태도를 현대주의라 하고,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를 현대성이라 한다. 영감의 원천은 과거에서나 미래에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는 현재라는 연결점의 유연한 인식이 아닐까. 더구나 노씨의 한글 활자에 대한 조형적 해석과 박씨의 전통한옥('빨대'의 또 다른 개념)의 해체적 개념은,한국적인 특성과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도 세계적인 작품이나 미래의 다양한 응용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귀감이 된다 하겠다.

초대받은 문학 콘서트가 한 해를 마감하는 행사였기 때문일까. 2009년을 보내는 우리의 자세도 어쩌면 영감의 원천과 같아야 할 것 같았다. 새해라고, 뭐 별천지가 열리겠는가. 주변의 버려진 것들과 흔한 것들을 되돌아보고, 그들에게서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찾아내면 그것이 바로 새해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우리도 삶의 예술가가 되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