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인터뷰] 메디컬디렉터 이일섭씨, "20년간 신약 임상시험 지휘…의사보다 더 많은 환자 살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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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개발 최종허가 바늘구멍
고통받는 환자 살릴때 보람
고통받는 환자 살릴때 보람
지난달 9일 영국 브랜포드에 있는 글로벌 제약회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본사.전 세계 의료시장에서 한 해 47조원(2008년 기준)을 벌어들이는 이 회사의 신약개발 담당 핵심 연구진 3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미팅의 주제는 '동북아시아 제약시장의 이해'.한국 · 중국 · 일본 · 대만 등 4개국 대표들이 차례로 국가별 시장 현황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한국 차례가 되자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중년 남성이 단상에 올랐다. 그의 프레젠테이션은 한 편의 짤막한 동영상으로 시작됐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Morning Calm)'를 주제로 석굴암,에밀레종 등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 문화유산이 소개되자 GSK 연구원들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어 한국경제의 규모와 삼성 등 글로벌 기업의 활약상,한국 제약시장의 현황과 성장 전망 등을 잇달아 제시하자 연구원들은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약 45분간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고,발표자는 미리 준비한 예쁜 한복 모양의 책갈피를 하나씩 선물로 돌렸다.
그는 외자 유치를 위해 온 정부 관계자나 직업 외교관이 아니다. 1983년 연세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의사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의사의 길을 걷지 않았다. 1990년 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지만 그해 한독약품에 메디컬 디렉터로 들어가 지금까지 한우물을 파왔다. 2005년 GSK로 옮겨 현재 국내 학술 및 개발 업무를 총지휘하고 있는 이일섭 부사장(52)을 서울 한강로 GSK코리아 본사에서 만났다.
▼메디컬 디렉터란 직업이 생소한데요.
"메디컬 디렉터는 쉽게 말해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의사입니다. 신약 개발을 하려면 각종 부작용 검증 등을 위한 임상시험이 필요한데 이를 기획 · 관리하는 역할을 주로 맡습니다. 임상시험은 실제 병원 환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제약회사에서도 대부분 약사가 아닌 의사가 맡고 있죠."
▼왜 평범한 의사의 길을 가지 않았나요.
"당시 한국에는 메디컬 디렉터란 직업 자체가 아예 없었어요. 새로운 영역이라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다국적 제약사에서는 의사들이 많이 일한다며 저를 이끌어주셨던 한독약품의 김영진 사장님(현재 회장)의 권유도 크게 작용했고요. "
▼가족들은 반대하지 않았나요.
"주변의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의사들을 상대로 로비나 영업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만류하는 분도 있었죠.또 약사가 많은 제약회사에서 의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
▼어려움이 많았겠네요.
"입사하자마자 회사에서 바로 독일 연수를 보내줬어요. 의사들이 제약회사에서 분야별로 정말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죠.당시 국내에서는 임상시험을 할 수 있는 법적인 기준이 겨우 마련된 상태였고,1995년에야 본격적으로 시행됐어요. 국내 전문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시스템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처지라 병원,대학,관공서 등을 오가며 고생도 많이 했죠."
▼임상시험을 하면 국내에 어떤 파급효과가 있나요.
"신약을 하나 개발하는 데 투입되는 돈이 1조원가량 되는데 이 돈의 상당 부분이 임상시험에 사용됩니다. 임상시험을 하는 국내 병원에 일정 금액의 연구비와 각종 기자재가 지원되는 데다 업무조정 및 모니터링 역할을 하는 전문 인력의 고용도 늘어납니다. 아울러 국내 의료계 종사자들의 지식과 경험을 축적할 수도 있어 파급 효과가 적지 않죠."
▼임상시험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먼저 신약 개발을 담당하는 영국 본사에서 특정 임상시험의 계획서와 프로토콜(세부 항목표)을 공개하면 전 세계 지사들이 서로 유치하겠다며 제안서를 제출합니다. 본사에서 이를 면밀히 검토해 몇 군데를 선정,프로젝트를 맡기는 식이죠.2004년 호주 지사의 제안서 채택률은 80% 정도였는데 한국지사는 25%에 불과했습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죠.일단 호주를 따라잡자는 목표로 한국의 높은 의료 수준을 알리기 시작했고,2008년에는 채택률이 80%를 넘었어요. "
▼언제 가장 보람을 느낍니까.
"얼마 전 국내 협력 병원 의사들을 초청해 컨퍼런스를 열었는데 이날 회의에서 유방암 치료제인 타이커브를 복용해 효험을 봤다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환자의 동영상 메시지가 공개됐어요. 이 환자의 사연을 보고 참석자들이 적잖은 감동을 받았죠.이 약은 GSK가 2007년 9월 식약청으로부터 최종 허가를 받은 겁니다. 사실 개발된 신약이 임상시험을 거쳐 최종 허가를 받는 확률은 10% 미만입니다. 이 때문에 신약 개발에 무려 10년이 걸리기도 하죠.이처럼 어렵고 긴 과정을 거쳐 개발된 약이 고통을 겪는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
▼좌절은 없었나요.
"2007년 본사에서 'R&D 글로벌라이제이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해외 R&D 센터를 한 곳 설립키로 하고 입찰을 실시했어요. 각국 지사별로 경쟁이 세게 붙었죠.1차로 11개국이 선정됐고 중국 · 인도 · 한국 등 3개 국이 최종 후보에 올랐는데 중국에 밀려 좌절을 겪어야 했어요. "
▼한국이 동북아 의료허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부가 보다 전략적이고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사실 대통령이 다국적 기업의 CEO를 만나 투자를 요청해도 난감해하는 반응이 돌아올 뿐이죠.한국이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정해 먼저 종합적인 제안을 해야 합니다. 제약업의 경우 한국이 강점을 갖고 있는 항암제나 신경과학 분야에 특화한 연구단지를 개발할 테니 이곳에 R&D센터를 세워달라는 식으로 해야죠."
▼앞으로의 목표는 뭔가요.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면서 오히려 애국자가 다 됐어요. 지난달 제가 특별 제작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들고 본사로 날아가 발표한 것도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였죠.지금 국내 제약산업은 중요한 기로에 와 있어요. 제네릭(복제약) 위주의 영업에서 벗어나 혁신을 통한 신약 개발에 적극 나서야 하거든요. 저도 국내에 GSK의 R&D센터를 유치하는 등 제약 산업의 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어요. "
▼후배 의사들에게 조언을 한다면요.
"메디컬 디렉터는 개업의에 비해 보수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약 개발에 참여해 수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고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입니다. 이 때문에 어학,마케팅,비즈니스 마인드도 필요한데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후배들이 많이 들어와 줬으면 좋겠어요. "
글=이호기/사진=정동헌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