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우리 기술로 국산 플랜트 설비를 만들자."

1983년 12월1일 울산.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 높은 파도를 바라보던 44세의 회사원이 혼잣말을 했다. 꽉 다문 입에서 흘러나온 입김이 차가운 공기에 부딪혀 하얗게 흩어졌다. 호주머니에 넣어둔 종이봉투를 손으로 꼭 쥐었다. 19년간 일해 온 회사에 제출할 사직서였다.

#2. 2009년 12월16일 서울.'2009 한국을 빛낸 올해의 무역인상' 시상식장에서 그 회사원의 이름이 호명됐다. 장세일 ㈜일성 회장(70).지식경제부와 한국무역협회,한국경제신문이 공동 제정한 이 상은 6만4000여 무역협회 회원사 가운데 올해 가장 두드러진 수출 활동을 보인 최고경영자(CEO)에게 주어진다.

장 회장은 퇴직금 7000만원을 밑천으로 창업 25년 만에 일성을 세계적인 중견기업으로 일궈낸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2억~3억원에 불과했던 회사 매출은 4반세기 만에 2500억원대로,4명이던 직원은 340명으로 불어났다. 창업 이후 매년 회사 매출을 두 배가량으로 끌어올린다는 당초 목표를 달성한 결과다. 시상식이 열린 서울 삼성동 무역협회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시상식 직후 수출 상담을 위해 중동행 비행기를 타기로 돼 있었다. 장 회장은 1시간 남짓한 짧은 인터뷰 내내 '신뢰'라는 단어를 10회 이상 반복해 사용했다.

▼큰 상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모두 직원들 덕입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어요. 업력이 쌓이니까 시스템이 좋아져서 직원들끼리만 있어도 회사가 톱니바퀴처럼 잘 돌아갑니다. 일성은 정유 및 석유화학 설비용 열교환기,압력용기,반응기,산업용 보일러 등을 생산해 전 세계 2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셸,엑슨모빌,벡텔 등 세계적 업체들이 고객들이죠.지난해 매출은 2200억원이었습니다. 올해는 2500억원 정도,내년엔 어림잡아 3000억원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중 90%가량이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입니다. "

▼1993년 수출이 100만달러였는데 올해 수출액이 2억달러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산술적으로 200배 성장한 셈입니다.

"굳이 말하면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도록 준비한 게 비결이라고 할 수 있겠죠.3년전 세계 석유화학 플랜트 시장이 커질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원유 가격이 치솟자 석유화학 업체들이 시설확장에 경쟁적으로 나서던 때였죠.원유만 달랑 팔면 1배럴에 20~30달러 밖에 못버는데 이걸 정제해 팔면 1000달러 이상 받으니까요. 이를 감안, 3만㎡ 정도였던 생산공장 부지를 19만㎡ 크기로 6배 이상 늘리겠다고 했더니 주변에서 미쳤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밀어붙였어요. 이렇게 하는 데 400억원이 들어갔지만 그게 적중한 겁니다. 지금은 해외영업을 특별히 하지 않아도 해외업체들이 제발로 찾아옵니다. "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가 극심했을 텐데.어떻게 차별화했나요.

"얼핏 보기에는 설비들이 단순한 쇳덩어리처럼 보이지만 대단히 정밀한 기술과 첨단 부품들로 이뤄진 것들입니다. 화학반응과 관련된 설비들인 만큼 설계도와 조립된 설비가 0.001㎜의 오차도 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 안전성까지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죠.우리 회사의 25년 노하우를 하루아침에 따라올 수는 없습니다. 이런 설비를 원하는 시기에 납품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어요. 잠을 못 자더라도 무조건 납기는 맞춘다는 원칙을 종교처럼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반면 경쟁사들은 전체 물량 중 20% 정도는 못 맞추는 게 현실입니다. 납기를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게 적정 규모의 생산시설입니다. 그래서 돈만 생기면 생산부지를 계속 사들였고 숙련된 인력을 스카우트했습니다. "

▼회장이 직접 수출 협상에 나서나요.

"큰 건은 아직도 직접 협상테이블에 앉습니다. 이번 중동 출장도 잘 풀리면 몇 년치 먹거리를 한꺼번에 확보할 수 있습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꽤 있죠.10년 전 중동 지역 교두보인 이란을 개척할 때 얘기입니다. 이란 정부가 제 입국을 거부했어요. 여권에 미국 입국도장이 워낙 많이 찍혀 있다 보니 저를 미국 중앙정보부(CIA) 요원으로 의심한 거죠.현지 기업인들과 한국 외교부 측이 '그런 사람이 아닌 진짜 비즈니스맨이 맞다'고 신원보증을 해줘 겨우 위기를 모면했어요. 물론 1300만달러짜리 계약도 체결했고요. "

▼위기가 없지는 않았을 텐데요.

"2001년에 발생한 9 · 11테러 사태가 대표적인 위기였죠.미국 발전소 관련 플랜트 수주 물량이 50%가량 취소됐습니다. 날벼락이 따로 없었죠.미국 시장에 기대를 걸고 200억원을 들여 5만9400㎡짜리 공장을 새로 만들었는데,그냥 놀릴 수밖에 없었어요. 설비투자와 땅 구입비 등이 고스란히 빚이 되고 말았죠.3년간 100억원 가까이 손실을 봤습니다. "

▼수출기업으로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가장 힘든 일이 바로 사람 관리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를 데려다 기술을 가르쳐 일할 수 있게 만들어 놓으면 곧장 대기업에서 데려가면서 아찔한 상황이 빚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인력이 갑자기 빠져나가면 수주물량을 소화하는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속상한 문제입니다. 능력 있다고 특정 직원의 월급만 대폭 올려줘 붙잡아 둘 수도 없습니다. 고민이 큰 게 사실입니다. "

▼일성은 무노조경영으로도 유명합니다.

"노조 설립을 반대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합니다. 단 회사를 살리는 노조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한번도 결성되진 않았어요. 아마도 경영진과 직원들이 가족같이 지낸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회사와 직원들이 서로 소통이 안 되면 노조의 필요성을 느낄 텐데 우리는 얘기가 잘 통하는 편입니다. 시간만 나면 울산 둔치에서 축구 한판 뛰고 불고기 안주에 소주 한잔하는 회식을 저나 직원들 모두 좋아합니다. 한 달에 3~4회 정도니까. 거의 매주 모이는 셈이죠.이 얘기 저 얘기 하며 자주 얼굴을 맞대면 의사소통은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임금도 매년 10~20%가량 알아서 올려줬고요. "

▼노조 결성 시도가 아예 없었나요.

"있긴 있었죠.1987년께였는데 모 대기업 출신 직원 수십 명이 경력직원으로 한꺼번에 입사했어요. 기존 직원들과 똑같이 대해줬죠.술 마시고,축구하고, 등산 다니고.그런데 이들이 사실은 상급노조로부터 모종의 임무를 지시받고 들어온 친구들이었어요. 하지만 이 팀의 리더 격인 한 직원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와서 사표를 내며 웁디다. 이유를 물었더니 '인간적으로 대해 주신 사장님을 차마 배신할 수가 없다. 내가 나가겠다'고 대답했어요. "

▼앞으로 목표와 구상이 궁금합니다.

"5년 내 매출 1조원 돌파가 목표입니다. 이후의 일은 하늘에 맡겨야죠.물론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기술연구에 대한 투자를 대폭 강화할 계획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철판 두께가 20㎝ 이상인 초고압 플랜트 용기나 초고온 용기 등을 만드는 기술력은 약한 편입니다. 태양광이나 석탄가스발전 같은 차세대 에너지사업도 구체화할 계획입니다. 미국의 특수에너지 업체를 인수 · 합병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갈 길이 아직 멉니다. "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