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주중 바쁜 일정을 보내고 주말 오랜만에 운동을 한데 이어 일요일에는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참석했다. 피곤했던 탓인지 돌아오는 길에 문득 선뜻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그대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감기라는 단어 '기(氣)를 느끼다(感)'란 뜻 그대로 순간적으로 한기를 느낀 것이다. 한방에서는 감기를 외감(풍 · 한 · 서 · 습 · 조 · 화 등 6氣 중 寒氣)에 의해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이라고 한다는데,내 경우엔 정말 실감나는 일이었다.

어제 저녁도 송년모임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송년모임을 알려온 총무는 코맹맹이가 된 내 목소리만 듣고도 참석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신종플루라는 독감이 유행해서일까. 서둘러 전화를 끊는 폼이 제발 참석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처럼 들릴 정도였다. 어쨌든 감기 덕분에 일찍 쉴 수 있게 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마시고 장소를 옮겨서 풍부하지 못한 성량으로 노래까지 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감기는 악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로로 면역력이 약해져 휴식이 꼭 필요할 때 감기에 걸림으로써 강제로라도 휴식하게 만드는 우리 몸의 메커니즘은 참으로 신비롭다는 생각이 든다.

칼 융이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중년부인들의 '갱년기 우울증'이 외부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자기의 잠재의식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했다. 잃어버렸던 자신의 꿈을 환기시켜 줌으로써 충실한 노년을 준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감기도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충전의 시간이거나 피곤한 육체에 휴식을 주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닐까. 비몽사몽간에 느끼는 통증을 통해 오랜만에 평소 몸 관리에 대해 반성하게 되고 미열과 콧물,칼칼한 목만으로도 육체는 겸손해지고 만다. 새삼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것 없이 연약한 존재인가 깨닫게 된다.

따뜻한 물을 마시면서 하룻밤을 푹 쉰 것만으로도 감기 증세는 호전됐다. 문득 자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 균 · 쇠'란 책에서 본 아메리칸 인디언들 이야기가 생각났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 2000만명에 달했던 인디언들이 100년 남짓한 동안에 90%가 몰살당해 200만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유럽인들 사이에 흔한 전염병이었던 홍역,매독,감기 같은 병균에 대해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천년간 가축을 키우면서 수많은 전염병을 교환하며 살아온 유럽인들에 비해 소나 말 등을 가축으로 길들이지 못한 그들에게는 전염병이 치명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수많은 유형의 바이러스에 대항해 싸우는 동안 길러진 전력 때문인지 비교적 쉽게 감기를 이겨냈다.

잠시의 휴식으로 자신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졌고,내일에 있을지도 모르는 바이러스 재 침입에 대비한 면역력도 키웠으리라 생각하니 내게 찾아온 감기에 고마운 생각이 든다.

심윤수 <철강협회 부회장·yoonsoo.sim@ekos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