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만 해도 한국경제는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경제학자들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1930년대 대공황보다 더 심각한 사태라고 분석했다. 한국은 진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태풍의 눈에 들어간 듯했다. 원 · 달러 환율이 1500원대로 치솟았다. 은행들은 어느 곳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었다.

2007년 베어스턴스가 파산위기에 몰릴 때만 해도 찻잔 속의 태풍이려니 했다. 작년 9월 리먼이 쓰러지면서 금융시장이 올스톱되고 실물경제에 충격파가 미칠 때야 비로소 시장의 야수성에 치를 떨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시장은 평소에는 효율을 극대화하는 '천사'이지만 경제주체들의 탐욕이 도를 넘어서면 시스템을 파괴하는 '악마'로 변한다. 시장이 악마로 변해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금융위기는 1973~1997년 선진국에서만 44번,신흥국에서는 무려 95번 있었다.

어느 새 먼 옛날 일 같다. 우리 경제는 내년에 5%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빠른 회복세로 어디서나 부러움의 대상이다.

악마를 누른 것은 정부였다. 희망근로,청년인턴,잡셰어링(일자리 나누기),중소기업에 대한 퍼주기 대출과 100% 보증,은행의 자본확충 지원,기준금리를 연 2%까지 내린 것 등등…. 비판은 있었지만 그것마저 안 했더라면 실업대란이 불가피했을 게다.

거둔 세금 범위에서만 나라살림을 집행해온,그래서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어온 개발연대 선배들의 덕이 아닐까 싶다. 정부가 작년 11월 수정예산안,올해 3월 추가경정예산으로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 수 없었다면 지금도 한국경제는 악마와 씨름하며 피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역시 항상 악마를 퇴치하는 '구세주'는 아니다. 언제든지 '폭군'으로 변할 위험성이 크다. 금융당국이 시장규율을 앞세워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의 장기 집권을 막으려 하는 유혹도 그런 조짐이다. 담보도 보증도 없는 신용 최하위 등급의 영세상인을 위한 저금리대출인 미소(美少)금융도 오래 가면 시장질서를 어지럽히는 폭군이 될 수 있다. 투자비용이 버거운 전기자동차 개발,기업과 개인들의 비용부담이 막대한 이산화탄소 감축도 녹색성장을 선도해야 한다는 구세주 역할에 기울어 너무 서두르지 않는가 하는 우려를 낳는다.

지금은 물속에서 건져올린 통나무에 다급하게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인 꼴에 불과하다. 그 기름이 다 타 버리고 나면 어떻게 되나. 여전히 젖어 있을 통나무를 무엇으로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올해보다 내년,내년보다 내후년을 더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년 상반기까지는 어떻게든 재정의 힘이 살아있겠지만 그 이후는 막막하다. 위험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야성적 충동을 가진 기업가 정신은 최근 잇단 M&A(인수합병) 실패로 크게 위축돼 있다.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서비스업 규제완화는 이해집단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13년간 끌어온 노조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도 표 앞에 흐물흐물해진 국회의원들의 이중 플레이로 제대로 시행될지 미지수다.

의사당의 또다른 폭군들은 한시가 급한 내년 예산안의 뒷다리를 잡고 '난동'을 부리고 있다. 그렇게 2009년 세밑이 저문다.

고광철 <부국장 겸 경제부장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