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보너스.월급쟁이들에겐 자다가도 입이 벌어지는 단어다. '돈,돈,돈'하는 마누라의 잔소리를 일거에 잠재울 수 있다. 밤샘 격무의 고통도,줄타기 같았던 상사 눈치보기의 아슬아슬함도 하루아침에 잊을 수 있다. 몰래 사용했던 카드빚으로 인한 가슴앓이도 한 순간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게 연말 보너스다.

그렇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1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도 보너스를 구경도 하지 못하는 직장인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진다. 보너스를 받더라도 옆의 동료보다 적은 액수를 받았을 때의 허탈감도 무시할 수 없다. 성과급 형태로 주어지는 연말 보너스에 대한 김 과장,이 대리의 다양한 추억을 모았다.

◆보너스?…생각만 해도 울화통

바이오 회사에 다니는 정수진 과장(34)은 연말만 되면 우울해진다. 말도 안되는 연말 성과급 분배관행 탓이다. 그는 인센티브 성과급이 말 그대로 개인의 1년 성과를 평가해서 차등 지급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회사는 매년 똑같이 성과급을 나눠주고 있다. 올해도 250여만원가량의 성과급을 전 직원에게 지급할 예정이다. 정 과장의 올 평점은 'S등급'.팀원 10명 중 가장 빼어난 성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등급'이나 'C등급'을 받은 직원들과 같은 보너스를 받으니 유쾌할 리가 없다.

정 과장은 "내가 희생해 남들 좋은 일 시켰다고 자위해 보지만 기여도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성과급 시스템에서 일한다는 데 화가 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많이 받아도 문제

외국계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김인숙 과장(33)은 정 과장과는 반대의 경우다. 개인별 성과에 따라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는 시스템 때문에 뼈 아픈 경험을 했다. 지난해 프로젝트별 평가에서 자신이 진행한 프로젝트에 아무 생각없이 자신의 기여도를 '100'으로,다른 팀원들의 기여도는 '제로(0)'로 기재했다.

한 달 뒤 직원 중 성과급이 가장 많이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임원 회의에서까지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직원'이라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연륜이 쌓인 고참 직원들의 한마디에도 엄청난 지식재산권이 녹아 있다는 점을 간과했던 게 화근이었다. 김 과장은 "한동안 사내에서 악명을 날리는 계기가 됐다"며 "성과급을 다 토해내고 싶을 만큼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털어놨다.

◆동기들 회식비를 부담하라니?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는 조춘만 과장(36).연말 회사 동기 모임의 1,2차 회식비는 으레 그의 몫이다. 4년 전 회사의 주력 부서,그것도 가장 실적이 좋은 팀으로 옮긴 뒤부터 매년 모임의 물주(物主) 노릇을 하는 신세가 됐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을 유산이 많거나,주식투자로 대박을 터뜨려서가 아니다. 가장 좋은 실적을 내는 부서에 소속된 덕분에 특별 성과급을 매년 다른 동기들보다 많게는 1000만원 가까이 더 받기 때문이다.

첫번째해에는 동기들의 볼멘 목소리와 질투 어린 싸늘한 눈빛을 잠재우기 위해 회식비를 자진해서 떠안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 뒤론 동기들 송년회비를 부담하는 게 관행이 됐다. 급한 일이 생겨 회식자리에 참석하지 못해도 100만원이 넘는 회식비를 꼬박꼬박 총무를 맡는 동기의 통장으로 보내고 있다.

딴주머니 차려다 이혼 위기까지

맞벌이를 하는 이연희씨(32)는 작년 연말 남편의 행태만 생각하면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불황으로 연말 보너스가 나오지 않는 회사가 대다수였던 지난해,이씨 역시 연말 성과급을 받지 못했다. 이 씨는 어느날 남편에게 "자기네 회사는 성과급 나와?"라고 물었다. 그러자 "실적이 좋지 않아 다들 자진 반납하는 분위기"라는 심드렁한 답변이 돌아왔다. 여자의 육감은 날카로웠다.

이씨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혹시 남편이 아무개 회사에 다니는 분 계시나요'라는 글을 올렸고,남편 회사에서 기본급의 200%에 달하는 성과급을 일괄 지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저녁 남편의 자백을 받아낸 이씨는 명세서에 적힌 십원 단위까지 몰수했다. 이씨는 "돈 몇 푼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였다"며 "지난해 '성과급의 난'이후 경제권을 장악하는 등 소득도 있었다"고 말했다.

◆"보너스 없인 못 살아"

중견 기업에 근무하는 최민철 과장(34).매달 적지 않은 돈이 급여 통장에 들어오지만 부지불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대출 이자에 부모님 용돈까지 챙겨드리다보면 빠듯할 정도다. 친구들을 만나 오랜만에 기분이라도 내는 달이면 순식간에 마이너스 인생으로 전락한다. 최 과장은 "매년 연말 보너스를 받아 밀린 카드빚 등 가계 부채를 갚는다"며 "연말 성과급이 가계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라고 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리급 직장인들에게 연말 성과급은 가뭄 속의 단비와 같다. 결혼하기 전에 미처 청산하지 못해 아내 몰래 갖고 있는 마이너스통장 빚을 갚을 수 있어서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김인모 대리(31)는 작년 연말 성과급을 마이너스 통장 빚을 갚는 데 쓰려고 했다. 문제는 월급 통장을 아내가 관리한다는 점.성과급은 월급 통장으로 자동 입금돼 버렸다. 김 대리는 "회사에서 돈이 잘못 입금됐으니 반납하라고 전화가 왔다"며 그 돈을 받아 마이너스통장 빚을 갚았다.

◆얄팍해진 봉투…한숨만 나와

은행에 다니는 한진만 과장(37)은 요즘 연말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연말에 받던 두둑한 보너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2007년 말만 해도 200% 특별 성과급에다 기본 보너스까지 합쳐 500%의 성과급을 받아 1000만원가량을 손에 쥐었다. 올해는 아니다. 월급 외에는 만원 한 장도 더 쥐기 힘들다. 실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성과급의 '성'자도 못 꺼내게 하는 분위기가 은행에 형성된 탓이다.

은행들은 매년 임 · 단협에서 결정된 임금 인상률만큼 연말에 소급해서 지급한다. 임금이 어느 정도 오르면 12월 월급통장엔 매달 인상된 돈이 한꺼번에 입금된다. 굳이 특별 성과급을 받지 않더라도 연말 기분을 낼 수 있다. 올해는 임금이 동결된 탓에 이런 기분도 사라졌다. 동결된 임금에서 5%가량을 반납한 터라 연봉 총액은 오히려 줄었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급여 지급방식도 바뀌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분기말인 3,6,9,12월에 보너스가 나왔다. 올해부터는 연봉을 14로 나눠 매달 말과 명절(설 및 추석)에 나눠준다. 한 과장에겐 이래저래 쓸쓸한 연말일 수밖에 없다.

이정호/이관우/김동윤/정인설/이고운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