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이런다고 소용없습니다. 못 빌려드려요. " "금성이 망할 회사입니까. 밀어주세요. 한 달짜리도 괜찮습니다. "

LG그룹이 반도체 사업에 피치를 올렸던 1989년.금성반도체(현재 하이닉스반도체로 흡수) 재무담당 상무의 일과는 매일 똑같았다. 금융권 여신 담당자들과의 전화 통화가 하루 일과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그에게 떨어진 임무는 4MB(메가바이트) D램 생산라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금 10억달러(당시 환율 기준 8000억원)를 조달하는 것.

회사채를 발행하거나 상환기간이 긴 장기 대출을 알아보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는 집요하게 금융회사 임원들을 설득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출처,이자,상환기간을 따지지 않는 '3불(不) 고육책'까지 동원했다. '리스크'를 이유로 한동안 대출을 꺼리던 은행과 단자회사 임원들은 결국 대출 서류에 사인을 했다. "'독일병정'을 어떻게 당해내겠느냐"는 게 금융권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시작을 했으면 뿌리를 뽑아야지"

이 일화의 주인공은 정병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 부회장(63)이다. 그는 LG그룹에서 가장 돈을 잘 빌렸던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룹 수뇌부는 사업을 새로 시작해 자금 수혈이 필요한 계열사가 생기면 어김없이 그를 CFO(최고재무책임자)로 내보냈다. 덕분에 정 부회장은 1987년부터 1997년까지 10년간 화학,반도체,상사,전자 등 주력 계열 4개사의 CFO를 순차적으로 역임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직했던 LG산전(현재 LS산전)과 CNS 등을 합하면 발도장을 찍은 회사의 숫자가 6개로 많아진다.

"일종의 구원투수 역할을 한 거죠.돈 걱정 안 하면서 월급 받는 게 소원이었어요. "

전경련으로 자리를 옮긴 뒤 정 부회장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그의 '대출꾼' 경력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온화한 웃음과 소주 한두 잔이 한계인 주량,작은 체구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얼굴 등 겉으로 드러난 조건들로 봐서는 삭막한 금융권과 협상력이나 돌파력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 부회장은 '성의'와 '근성'을 무기로 금융권 관계자들을 녹였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경쟁자들보다 두 배 이상 노력하는데 안되는 게 이상하지 않으냐"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일이건 취미건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미다. 지는 게 싫어서다. '골프 입문기'에 그런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골프를 시작하고 3년간 정 부회장의 별명은 '미스터 클락'이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새벽 5시에 골프연습장에 나갔기 때문이다.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야근자를 깨워,문을 열게 하는 게 그의 일과였다. 퇴근 뒤에도 반드시 연습장에 들러 스윙 폼을 교정했다. "3년만 아침 저녁으로 골프채를 휘둘러봐." 어떻게 하면 싱글이 될 수 있느냐는 후배들의 질문에 대한 정 부회장의 답이다.

◆"LG 선배들이 스승이다"

정 부회장의 성장사는 화려한 그의 이력과 달리 평범하다. 경남 하동에서 농사일을 하던 집의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큰형님 집에 15년을 얹혀살면서 학업을 마쳤다. 용돈을 벌기 위해 방학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 연애할 시간이 없어서 사촌 형수의 소개로 중매 결혼을 했다. 경복고,연세대를 거쳤으니 남보다 못한 공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교에서 손에 꼽을 만한 수재 역시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왜 LG에 입사했느냐는 질문에도 여느 CEO(최고경영자)들이 설명하는 '꿈'이나 '야망' 같은 단어들은 나오지 않았다. 기업으로 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가장 먼저 다가온 '무시험 입사'의 기회가 LG였다고 한다.

삶의 심지에 불이 붙은 것은 LG에 입사한 이후다. 정 부회장은 기업 일이 무척 재미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온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의 '교사'는 회사 상사들이었다. 지금은 역사소설가로 변신한 김영태 전 LG CNS 사장은 신입사원으로서의 자세와 다독(多讀) 습관을 일깨웠다. 부장 시절 만난 손기락 전 LG산전 부회장에게서는 일하는 방법을 배웠다. "모든 일에는 1안 외에 2안과 3안을 준비해야 한다"는 손 전 부회장의 말이 직장생활 내내 도움이 됐다는 설명이다.

직장생활의 가장 큰 고비를 묻자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상사에게 대들지 않아서인지,큰일을 잘 피해서인지는 모르겠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에스프레소 한 잔 하라고"

정 부회장은 "부하직원들이 일을 못한다"는 얘기를 듣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조직 단위로 움직이는 기업에서는 "팀의 패배가 곧 팀장의 패배"라는 게 그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그가 '열등생 팀원'들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쓰는 처방은 다양하다. 부하직원과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간부에게는 리더십 컨설턴트를 붙이고,직무 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에게는 장기 직무교육을 시킨다.

정 부회장은 "혼을 내고 다그치는 것만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며 "직원들이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개선하도록 유도하는 게 리더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전경련 직원들은 부회장실을 '커피숍'이라고 부른다. 늘 문이 열려 있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는 커피.정 부회장이 사무실에 비치한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직접 커피를 내려 내준다. 정 부회장은 "사실 '커피 경영'의 원조는 구자홍 LS 회장"이라며 "손수 차를 내주던 LG 상사들의 모습이 좋아 보여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깜짝쇼'도 그의 장기다. CNS 사장 시절,당시 사보였던 '사랑의 우체통' 코너에 한 직원의 딸이 올린 '첫째 딸의 새해 소원'을 읽고 난 뒤 호텔 뷔페권을 사들고 간 일화는 아직도 CNS 직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그의 일하는 방식은 '스마트 워킹(smart working)'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오래 자리에 앉아 있다고 성과가 나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야근을 하는 직원은 되레 인사고과에서 감점을 당한다.

업무 스타일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은 '10초 결재'다. 결재 서류를 쓱 훑어본 뒤 바로 서명을 한다. 처음 정 부회장을 경험한 직원들이 "보고서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건가"라는 의구심을 토로할 정도다. "평소 직원들이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고 뭘 준비하는지를 눈여겨보면 결재 서류를 오래 들여다볼 이유가 없어요. 직원들과 같은 방에서 호흡하던 상무 시절에는 결재 속도가 참 빨랐는데.요즘은 사실 10초를 넘길 때도 많아요. "

◆"포장마차라도 자기 것이면 성공한다"

전경련 부회장은 주요 대기업 총수들과 수시로 만나야 하는 자리다. 격월로 열리는 회장단 회의를 제외하고도 수시로 대면이나 전화로 총수들과 의견을 교환한다. 그에게 오너 경영인들의 공통점을 묻자 "넓은 시야"란 답이 돌아왔다. 한 기업에만 집중하는 전문 경영인들과 달리 세계 경제의 상황과 정치권 동향,미래 산업의 트렌드 등을 두루 꿰뚫고 있다는 설명이다.

재계 고참 CEO의 눈에 비친 흥하는 조직의 특징은 무엇일까. "허름한 포장마차라도 자기 것이라면 성공한다"는 게 정 부회장이 내린 답이다. 자신이 속한 회사가 내 회사라고 생각하는 직원들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기업의 성패가 갈린다는 의미다. "공장 앞에 휴지를 떨어뜨린 뒤 지나가는 직원들이 치우나 안 치우나를 보면 그 회사의 미래가 보여요. 치우는 사람들이 없으면 그 회사의 미래는 안 봐도 뻔한 거죠."

정 부회장에게 개인적인 미래 계획을 물었더니 주저없이 "멋지게 놀아야죠"라고 대답했다. "LG에서 은퇴하고 전경련 부회장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2년간 놀아봤더니 좋더라고요. 매일 여행다니고 평소 못 읽던 책 읽고,친구들이랑 골프장 다니고….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야죠.그때 후회 안 하려면 지금은 더 열심히 해야죠."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