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된 전인권의 책 '남자의 탄생'에는 흥미로운 고백이 등장한다. 삼형제 중 둘째 아들이었던 필자는 어린 시절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맏이인 형도 아니요 막내인 동생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후에야 비로소 형과 동생 저마다 엄마의 사랑은 바로 자신이라 믿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는 게다.

덕분인가,필자가 돌이켜보니 삼형제가 서로 우애 있게 지낼 수 있었던 건 서로를 존중하거나 형제애(兄弟愛)의 가치를 인정해서라기보다는 '엄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엄마를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그리 했음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가족관계의 숨겨진 역동성이 한국의 정치 및 사회문화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면서,우리네 특유의 갈등관리 양식을 만들어냈으리란 것이 필자의 글 곳곳에 묻어 있다.

그러고 보니 올 한 해도 한국사회는 갈등으로 문을 열고 투쟁으로 문을 닫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국회 단상에서부터 광화문 광장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격렬한 충돌을 낳고 틈만 나면 '정권퇴진'을 외치는 미성숙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무분별하고도 과도한 갈등의 분출로 인해 모두가 치러야 했던 사회적 비용이 천문학적 수치에 이를 것이란 전망은 이제 더이상 낯설지 않다.

물론 갈등 자체를 부정적으로 폄하할 건 아니다. 가족만 해도 건강한 가족일수록 갈등이 부재(不在)한 것이 아니라 갈등을 원만히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데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가장이 절대 권력을 행사할 경우 표면상으로는 가족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속으로는 아내와 아들 딸들의 불평과 불만이 쌓여가게 마련이다.

여타의 사회집단과 조직 또한 상황이 다르지 않을진대,평소 누적된 좌절감이 마지막 순간에 폭발적으로 분출되면서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란 절박감 아니면 '너 죽고 나 죽자'식의 극단적 방법에 의존해왔음은 누차 경험해온 우리의 현실 아니겠는지.

이제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도처에 뿌리 내리고 있는 사회적 갈등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음에 주목한 정부의 주도하에 사회통합위원회가 발족된다는 소식이다. 적시에 의미 있는 출발로 기록되리라 기대하면서,바라건대 사회통합의 의미를 설정하는 작업부터 새로운 사회 환경에 부응해 새롭게 정립되길 희망한다. 통합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 중,일사불란하게 하나가 되는 획일적 통합(unifying)과 다양성 및 이질성을 전제로 공존의 지혜를 모색하는 호혜적 통합(integration)이 구분돼 있음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나아가 갈등의 해소 내지 극복 방안의 모색 또한 선언적 차원이나 일회적 이벤트성 프로그램을 넘어 보다 제도화된 접근이 필요할 듯싶다. 갈등은 주로 희소자원의 점유를 둘러싸고 오랜 시간 불균형과 부정의가 축적됐을 때,사회적 소수집단을 향해 부정적 고정관념과 차별적 관행이 만연할 때,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억지가 이곳저곳에서 통용될 때,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원인을 제거한다면 결과 또한 없을 터,사회 정의를 제도화하고 고질적 차별과 편견의 뿌리를 불식하는 동시에,제반 사회 시스템을 공평한 룰과 합리적 규범에 따라 운용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정착시키는 과제가 위원회 앞에 기다리고 있다 하겠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리 없고,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이니 단기적 효과나 가시적 성과에 연연해하거나 조급해하지 말고,장기적 비전 아래 체계적이고도 실현가능성 높은 정책을 통해 사회통합의 목표를 달성해갈 수 있는 성숙한 위원회로서 후세대를 위해 긍정적 준거모델이 돼 주길 더불어 희망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