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살다보면 그 나라의 언어를 통해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필자의 경우 멕시코에서 18년을 보내면서 스페인어를 배운 것이 멕시코인과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요즘은 매일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데,한국어에 차용된 영어 단어를 발견하는 것이 또 다른 재미다.

인터넷,컴퓨터,이메일 등 현대에 만들어져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있지만 필자의 흥미를 끄는 것은 20세기부터 사용돼 온 것들이다. 헬스클럽이나 골프장의 목욕탕에서 작은 의자에 앉아 바가지로 머리에 물을 끼얹는 장면을 볼 때면 이전에는 없었던 '샤워'란 새로운 개념의 영어 단어가 왜 필요한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테이블'도 마찬가지다. 필자도 한국의 전통적인 낮은 상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로 유연하지 못하다. 무릎보다 높은 '테이블'은 현대에 와서야 도입된 개념이다. 빌딩,커튼 등 다른 예도 많다.

더 흥미로운 것은 남녀 간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 중에는 로맨스,로맨틱,데이트,키스처럼 영어 단어가 많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한국에도 이러한 감정이나 행동들이 존재했을 텐데 왜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었을까. 아마도 한국인들에게 뿌리 깊은 유교사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인들은 분노,기쁨,슬픔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반면 남녀 간의 친밀함에 대한 표현은 삼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 결과 이를 표현하는 단어가 제한돼 있고 대신 영어가 도입된 것이다. 필자의 한국어 선생님 중 한 분은 1930년대에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결혼식 날 처음 만나 결혼했다는 얘기를 해 준 적이 있다. 만약 살아가는 방식이 그러했다면 '데이트'나 '로맨스' 같은 단어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HSBC은행의 송년회에서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은 한국인들은 무엇을 할 때 단체로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HSBC은행에 근무하는 외국인의 경우에는 부족한 재능에도 무대에서 홀로 창피당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 듯하다. 필자의 변변치 않은 노래와 키보드 실력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반면에 한국인들은 단체로 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집단 문화는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식당이나 극장에서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쇼핑이나 등산을 혼자 즐기는 사람도 드물다.

이러한 집단 문화는 '우리'란 말에도 반영돼 있다. '우리 집''우리 회사'처럼 한국인들은'나' 대신 '우리'를 사용한다.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알게 된 라틴 문화는 이보다 더하다. 남미인들은 자신의 집을 소개할 때 '내 집'이 아닌 '당신의 집'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언제라도 당신을 위해 자신의 집을 개방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 문화를 배우는 것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큰 기쁨 중 하나다. 한국어 실력이 늘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내년이 더 기다려지는 이유다.

메튜 디킨 <HSBC 은행장> ceohsbckorea@hsb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