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초순 이명박 대통령은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 상대방은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아부다비 왕세자였다. 한국이 프랑스,미국-일본 컨소시엄과 수개월째 치열한 경합을 벌여 온 원전 프로젝트의 최종 사업자로 선정될 수 있도록 지원하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미-일 컨소시엄은 사실상 탈락된 상태였고 아랍에미리트(UAE) 측이 "프랑스 쪽에 줄 수밖에 없다"는 통보를 간접적으로 해 왔다는 소식을 유명환 장관과 참모를 통해 전해듣고 이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일종의 '전화 담판'인 셈이다.

모하메드 왕세자는 칼리파 빈 자예드 알 나흐얀 UAE 대통령의 동생으로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하며 이번 원전 프로젝트 사업자 선정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실력자였다. 이 대통령은 30년간 지속된 원전건설을 통해 한국이 축적한 기술의 우수성 등을 꼽으며 집중 설득했다. "최고 품질의 원전을 짓겠다,후회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며 모하메드 왕세자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최선을 다했다.


포스트 오일 시대를 지금 준비해야 하며 원자력과 첨단 정보통신,인력양성 등 다방면에 걸쳐 협력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 전화 한통이 프랑스에 패색이 짙어진 상황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쪽으로 균형추가 완전히 쏠리지는 않았다. 때문에 이후 모하메드 왕세자와 모두 여섯차례 통화를 갖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 대통령의 전화가 프랑스가 사탕(원전 수주)을 삼키기 직전에 뱉도록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이 UAE원전 수주에 직접 나서게 된 것은 공기업인 한국전력이 UAE와 추진할 수 있는 협력 방안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고 한 참모는 전했다. 올해 초 3년간 공을 들여 온 고등훈련기 T-50의 UAE 수출 좌절 경험이 교훈이 됐다. 이 대통령은 T-50수출이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내가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는 "경쟁사인 이탈리아의 민간기업은 온갖 로비를 통해 전방위로 나선 데 반해 KAI(한국항공우주산업)는 정부 지분이 많은 공기업이라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였다"고 말했다.

따라서 UAE원전 수주전만큼은 전략을 달리했다. 이 대통령뿐만 아니라 총리,외교 · 지경부 장관 등이 발벗고 나섰다. UAE원전 수주전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입찰 자격심사에 한국전력 컨소시엄,일본 도시바,히타치(미국 GE와 컨소시엄),프랑스 아레바,미국 웨스팅하우스 등이 통과하면서부터다. 가격 입찰 등을 거쳐 한국전력과 아레바,히타치 컨소시엄 등 3파전으로 좁혀졌다.

프랑스가 먼저 움직였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5월 프랑스 해군기지 창설식 때 아부다비를 방문,아레바 컨소시엄의 원전 사업 참여 지원을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안 마리 이드락 해외무역담당 국무장관을 비롯한 고위급 인사를 아부다비로 잇달아 보내 로비를 펼쳤다. 프랑스는 획기적인 여러 인센티브를 꾸준히 제시하면서 UAE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는 루브르 박물관 분관을 아부다비에 짓는다는 내용의 13억달러 프로젝트까지 내놓았다. 더군다나 UAE는 그동안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와 한국으로선 불리한 상황이었다.

한국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이다. 한국은 6월 당시 한승수 총리를 UAE에 보냈다. 한 총리는 빈 라시드 알 막툼 UAE총리를 만나 양국 간 원자력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이 대통령은 11월 중순 한 전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특사단을 비밀리에 UAE에 보냈다. 최경환 지식경제부,김태영 국방부 장관 등이 동행했다. 특사단에 원전 수주와 관련이 없는 국방부 장관이 함께한 것과 관련,한국이 국방분야에서 UAE와 장기적인 협력 방안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도 비슷한 시기 아부다비를 찾아 모하메드 왕세자를 만났으며 한국 기업이 원전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을 당부했다. 특사단과 별도로 외교채널을 통해 한국-UAE 간 정부 차원의 협력을 제안하는 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우리 정부는 12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수주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막판까지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자칫 한국의 수주가 확실시된다는 식의 보도가 나면 프랑스의 방해가 예상되는 등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각 언론사에는 엠바고(일정 시점까지 보도자제) 요청을 했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수주전은 숱한 업(up),다운(down)이 반복되면서 피를 말렸다"며 "비즈니스 측면에서의 정상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아부다비(UAE)=홍영식/류시훈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