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직장에선 상명하복·취미는 선공후사…"2010에도 살아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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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로 본 2009년
구복지루(口腹之累).'먹고 살 걱정'이라는 뜻이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 한 해 직장생활을 축약한 사자성어'로 꼽힌 말이다.
모두가 먹고 살 걱정으로 시작한 한 해였다. 하반기 들어 경기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몸으로 느끼는 살림살이는 여전히 빠듯하다. 어떤 대기업은 사상 최대의 승진 잔치를 벌였다고 하지만 잘리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보면 뭔가 수를 내도 내야만 할 처지다. 집값이 뛰고 주가가 날아간다고 하지만 먼 나라 얘기다. 그저 좋은 상사 만난 걸 다행으로 여기며,스크린 골프나 당구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게 김 과장,이 대리들이다. 그들의 올 한 해 직장생활을 사자성어로 정리한다.
◆日職集愛可高拾多(일직집애가고십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이성곤 과장(34).글로벌 경제위기가 몰아닥친 작년 말 앞이 깜깜했다. 인터넷을 뒤지던 중 재미있는 말을 발견했다. '日職集愛可高拾多(일직집애가고십다)'가 그것이다. 그대로 해석하면 '하루의 업무는 애정을 모아야 능률을 높일 수 있고 얻음이 많다'는 뜻.소리나는 대로 읽어 '일찍 집에 가고 싶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우스갯소리였다. 이 과장은 올해 이 말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원뜻에 충실해 업무에 열정을 쏟기로 했다. 그래야만 칼바람 같은 구조조정 바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었다. 회사 운명에 대한 걱정과 야근에 눈치보기까지,2개월이 안 돼 이 과장은 파김치가 됐다. 몸보다는 마음이 힘들었다. 그래서 이 과장도 '일찍 집에 가고 싶다'를 되뇌게 됐다. 옆자리 동료는 '溢職加書母何始愷(일직가서모하시개)'란 우스갯소리도 있다며 회사를 가정처럼 여기라고 충고했다. 한자는 '일거리가 넘치고 서류까지 더해지니 어찌 아이들 엄마가 좋아하겠는가'는 의미이지만,말 그대로 '일찍 가서 뭐하시게?'란 의미로 쓰인다고 했다.
상당수 직장인들은 이 과장처럼 올 한 해를 보냈다. 구조조정과 임금삭감 불안감에 알토란같이 묻어뒀던 펀드가 반토막 나는 아픔까지 견뎌야 했다. 다행히 하반기 들어 이런 고통은 어느 정도 가셨지만 직장인에게 올 한 해는 '집에 가고 싶다'그 자체였다.
◆上命下福(상명하복) 夜讀重病(야독중병)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직장인에게 가장 큰 복은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다. 상사는 부하직원을,부하는 상사를 잘 만나는 것만큼 큰 복도 없다. 올해처럼 자리가 불안한 시기엔 더욱 그랬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철민 대리(32)는 이를 '上命下福(상명하복)'이라고 표현했다. '상사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뜻의 '上命下服'에서 '服'자를 '福'자로 바꾼 것.'상사를 잘 만난 부하는 복이 있다'는 뜻이란다.
김 대리는 "직장생활의 영원한 테마가 상사와 부하직원 관계라지만 가뜩이나 좋지 않은 경영환경에서 올해처럼 좋은 상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한 적이 드물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은 연초에 거하게 계획을 세운다. 밤이나 주말에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거나 실력을 연마하겠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회사에서도 이런 태도를 권장한다. 이른바 '샐러던트'가 그래서 각광받는다.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는 최모 대리(30)도 그랬다. 회사의 지원을 받아 야간대학원에 진학했다. 팀장은 "주2일은 일찍 퇴근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격려했다. 최 대리도 새벽 6시에 출근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인원감축으로 업무가 늘면서 팀원들의 태도는 슬슬 바뀌었다. 야근이 밥먹듯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틀에 한 번꼴로 얼굴을 비치지 않는 최 대리는 '공공의 적'이 됐다. 새벽에 아무도 없을 때 일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기적인 직원이라는 선입견은 가시질 않았다. 두 마리 토끼를 쫓던 최 대리는 속이 상해 위경련을 앓기 시작했다. 그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이 아니라 야독중병(夜讀重病)인 셈"이라고 탄식했다. 이와 함께 여직원들의 파워가 점점 세진다는 뜻에서 '여세등등(女勢謄謄)'이란 말도 나왔다.
◆隔岸觀火(격안관화) 不小株大(부소주대)
은행에 다니는 김모 과장(36)은 올해 초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알토란같이 모은 돈을 작년 초 펀드에 넣었는데 글로벌 경제위기로 반토막이 나고 만 것.아내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쳤지만 어떻게 보충할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다행히 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김 과장은 원금의 80%까지 회복하자 펀드를 냉큼 해지해 버렸다. 그런데 웬걸.코스피지수는 지난 9월 1700선까지 치솟았다. 가슴을 쳐봤지만 이미 떠나간 버스였다.
김 과장 같은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이 상당히 많다.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어 주가가 아무리 올라도,부동산이 아무리 들먹여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주식이나 부동산값 상승은 상당수 김 과장,이 대리들에겐 '강건너 불구경(격안관화 · 隔岸觀火)'에 불과했다. '부동산은 소형주택 위주로,주식은 대형주 중심으로 올랐다'는 의미의 '부소주대(不小株大)'란 말도 김 과장,이 대리에게는 남의 일일 뿐이었다.
김 과장은 "한창 부동산 · 주식이 뛰던 2년 전만 해도 '외환위기 같은 불황이 한 번만 더 오면 실수하지 않겠다'며 벼르던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는데 막상 작년 불황이 오니까 당장 쓸 돈도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더라"고 말했다.
◆先孔後事(선공후사)
불황을 견디기 위해 직장인들이 새로 찾은 올해의 놀잇감은 단연 당구와 스크린 골프였다. 이로 인해 직장인들 사이에선 선공후사(先孔後事)라는 말이 유행했다. '먼저 공을 친 뒤 일(事)은 나중에 한다'는 의미였다. 골프의 홀과 당구의 포켓을 의미하는 '구멍 공(孔)'을 사용한 우스개 말이다.
김 과장,이 대리들은 올 한 해 골프에 열광했다. 열에 서넛은 골프 손맛을 알게 됐다. 평일 저녁 7시면 '(스크린 골프)룸'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란 얘기가 들렸다. 임원급은 돼야 즐기던 '그들만의 스포츠'인 골프가 대리급까지 강림했다. 2만원 안팎이면 즐길 수 있는 스크린 골프 덕이었다. 회식문화도 바뀌었다. 삼겹살 · 소주였던 1차 코스가 '빼갈을 곁들인 18홀'이라는 짬뽕코스로 변하기도 했다.
추억의 당구도 '불황형 스포츠'로 부활했다. 현대그룹 계열사의 김모 대리(36)는 "부서 사람들끼리 저녁으로 자장면 시켜놓고 당구를 치다가 부장이 발동 걸리는 바람에 새벽 4시까지 당구를 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기당구가 판돈이 자꾸 커져서 몇 사람이 대판 부부싸움을 한 뒤에 요즘은 좀 뜸하다"고 덧붙였다.
이상은/이관우/이정호/김동윤/정인설/이고운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