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에 다니는 김진일 과장(37)은 새해 달력을 보다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3일 연휴가 별로 없다.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 등이 일요일이다. 설 연휴도 토 · 일 · 월요일이다. '빨간 날'만 기다리는 월급쟁이로선 가슴이 미어질 일이다. '무슨 재미로 사나'하는 순간 아내가 말을 건넨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6학년,4학년이 되는 만큼 학원비가 더 필요할 것"이라는 요지다.

젠장할….김 과장은 슬그머니 밖에 나와 담배를 빼어문다. '새해엔 끊어야지'했던 다짐이 이틀도 안 돼 물거품이 되고 만다. 돈을 더 벌려면 회사가 엄청나게 잘 돼야 한다. 그러나 아니다. 작년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하지만 월급이 크게 오르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렇다고 재테크에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직해서 몸값을 높일 재간도 없다. 그러니 어쩌랴.올해도 그저 개미같이 열심히 일해서 회사가 잘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이직해서라도 몸값 높이는 게 최고

광고회사에 다니는 이모 과장(34)은 요즘 마음이 붕 떠 있다. 실적이 좋아 연봉이 오를 것이란 기대 때문이 아니다. 작년 말 한 헤드헌터사로부터 이직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외국계 광고회사가 사람을 찾는데 옮겨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였다.

처음엔 망설였다. 그러다가 결심을 굳혔다. 몸값만 제대로 인정받으면 옮기기로 했다. 친구의 조언이 컸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던 친구는 작년 9월 중견기업으로 옮겼다.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연봉도 50%가량 뛰었다. 당연히 씀씀이가 달라졌다. 친구는 "평생 직장은 옛말"이라며 "기회가 되면 옮기라"고 권했다. 이 과장은 아예 올 목표를 이직으로 정했다. 이번에 옮기지 못해도 다음 기회를 알아볼 작정이다. 해가 갈수록 쑥쑥 크는 아이들과 덩달아 많아지는 생활비를 감안하면 기회가 왔을 때 옮기는 게 좋을 것이란 판단이다.

직장인들의 변하지 않는 새해 목표는 '돈'이다. 임금이 오르거나,이직을 통해 몸값을 높이거나,재테크를 통해 부수입을 챙기는 것 등이 전통적인 새해 목표다. 그러다보니 이 과장처럼 이직을 고려하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승진 안 하더라도 '가늘고 길게'

국내 굴지의 통신회사에 다니는 김모 과장(40)의 새해 목표는 '승진 안하기'다. 그의 동기들이 차장으로 승진하기 시작한 건 3년 전.몇 년째 승진대상에서 탈락하자 김 과장은 '승진 노이로제'에 걸렸다. "잘 나가는 남편보다 자상한 남편이 좋다"는 아내의 위로도 자꾸만 자신의 무능에 대한 핀잔으로 느껴졌다.

김 과장은 작년 말 마음을 접었다. 경쟁회사에서 대규모 명예퇴직을 실시하면서 비슷한 또래인 차장들이 옷벗는 걸 보고 나서다. 차장이 되면 관리직으로 간주된다.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명예퇴직 대상이 되면 꼼짝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다. 아직 아이들이 똘망똘망한데 허허벌판으로 떨려 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김 과장은 "회사에서 승진시켜준다면 누가 싫어하겠느냐"면서도 "이미 동기들보다 늦은 만큼 길고 가늘게 회사 생활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했다.

김 과장의 목표는 역설적이다. 자조적이기도 하다. 대부분 직장인들의 목표는 다르다. 같은 조건이라면 남보다 빨리 승진하는 게 목표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진으로 언제 떨려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김 과장의 새해 목표를 낳게 한 원인이다.

◆사기결혼과 성형로드맵도 등장

집안에 탈모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은 금융회사의 조모 과장(33).그의 새해 소망은 '사기결혼'이다. 최근 들어 머리카락이 부쩍 빠지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어서다. 이런 식이라면 머지 않아 '흑채'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조 과장은 더 이상 머리카락이 빠지기 전에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주변 사례를 들어보니 머리는 순식간에 빠지더라"며 "미래의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탈모 유전자가 발현되기 전에 결혼을 하고야 말겠다"고 말했다.

호텔에 근무하는 최 대리(35 · 여)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골드미스'다. 결혼이 싫어서가 아니다. 나이 서른이 되는 순간부터 소개팅에 나가 보고,작년엔 결혼정보회사에 등록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최 대리는 작년 말 친구들과 가진 송년회 자리에서 결론을 얻었다. 결혼을 할 거라면 보다 부드러운 '마스크'가 필요하다는 것.최 대리는 3년간 붓던 적립식 펀드를 환매해 성형수술을 받기로 했다. 다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너무 표시가 나기 때문에 분기별로 한 부위씩 단계적으로 개선해 나가기로 '성형 로드맵'을 작성했다. 올 크리스마스 이브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과 보내겠다는 것이 최 대리의 새해 결심이다.

◆소문도 내보고 목표도 줄여보고…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황모 과장(37)의 올 목표는 금연이다. 벌써 4년째다. 돌이켜보면 1월 한 달은 금연하는 데 성공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순간이었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주체할 수 없을 때 금연결심은 허무하게 무너지곤 했다. 황 과장이 새해 금연 결실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소문내기다. 가정과 직장에 "담배 끊었다"고 소문내기로 작정했다. 그러고도 담배를 피우면 정말 대책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옭아매기 위해서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박모 과장(36)의 새해계획엔 어김없이 네 가지가 들어갔다. 입사 후 10년 째 정초마다 '다이어트''금연''영어''재테크 성공'을 내걸며 '올해는 꼭 이루리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연말이면 늘 빈 손이다. 체중은 10년째 불어나 입사 때보다 15㎏이나 더 나간다. 영어는 잊은 지 오래됐고,대출 갚기도 빠듯해 마이너스 통장 한도를 더 늘리지 않는 것에 만족해야 할 형편이다.

박 과장은 올해 네 가지의 목표 중 하나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처음엔 네 가지에 다 도전한 뒤 상반기가 지난 시점에서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하나에 '몰빵'하자는 전략이다.

◆포트폴리오도 도입해 보지만…

의류업체에 근무하는 오모 대리(33)는 올해 작심삼일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새롭게 목표를 설정했다. 거창한 1년 계획을 세우지 않고 3일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이른바 '3일 룰'이다. 구체적으론 일주일 중 일요일을 제외한 6일을 둘로 나눠 '월화수 계획'과 '목금토 계획'을 정했다. 주 초반에는 과제를 많이 부여하고 주 후반에는 주 초반에 지키지 못한 계획을 추가로 달성하기 위해 느슨한 강도로 계획을 세웠다. 오 대리는 "3일마다 큰 목표를 다시 한 번 상기하며 3일 단위로 계획을 세우면 실천하려는 마음이 더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증권사에 근무하는 임모 과장(38)은 '포트폴리오식 신년 계획'으로 승부를 볼 요량이다.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금주,골프,다이어트 등 세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것.임 과장은 "회사 동료들과 술 마시는 시간을 아껴 스크린 골프를 통해 골프 실력을 연마하고,이를 통해 체중을 줄이겠다"고 말했다.

이관우/이정호/김동윤/정인설/이상은/이고운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