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최은영 한진해운회장 "잔잔한 바다는 유능한 뱃사람을 키울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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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家 안주인서 한국해운 이끄는 '선장'으로
인물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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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늘 아침에 진통이 와서 엄청 고생 끝에 예쁜 딸 낳았어요. "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48)은 최근 아침 출근 준비 중에 회사 직원으로부터 반가운 문자를 받았다. 얼마 전 출산휴가 들어간다고 인사왔던 A과장이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알려 온 것.최 회장은 곧바로 이모티콘까지 넣어서 답문을 보냈다. "첫째도 아니고 둘째 낳으면서 뭐가 그렇게 엄살이에요. 수고했어요. 요즘 시황도 안 좋으니 얼른 회복하고 나와서 일해요. ㅋㅋㅋ"
◆회장님 만세 '비바 동대문'
최 회장은 직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로 소문난 소탈한 경영자다. 직원 수만 5000여명,한 해 매출이 10조원에 달하는 국내 1위 해운회사의 오너 최고경영자(CEO)이지만 권위의식이란 찾아볼 수 없다. 지난해 정몽구 현대 · 기아자동차 회장의 아내 고(故) 이정화 여사 조문에 혼자 갔던 일은 유명하다. 주위 사람들은 '회장이 왜 혼자 갔냐'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낸다는 슬픔을 알기에 위로하고 싶어서 조문을 간 건데,임원들 수십 명을 동원하는 게 필요한 일이냐고 그는 반문했다.
직원들을 대할 때는 마치 친한 선배,친구처럼 자상하다. 휴대폰 문자와 이메일 교환은 물론이고 직원들과 팀별로 식사도 자주한다. 그런 최 회장을 직원들은 대한민국 보물 1호인 '동대문(DDM)'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따른다. DDM은 한진해운의 최고경영층을 지칭할 때 쓰는 코드명인 'DD'에 마담을 의미하는 M을 붙인 약어다.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딱딱한 호칭 대신 동대문이라는 별명으로 바꿔 불릴 만큼 격의없이 직원들과 소통한다. 직원들끼리 회식할 때는 '비바 동대문(만세 회장님)'이라는 건배구호까지 등장할 정도다.
◆"나는 깡이 센 여자"
1962년생인 최 회장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여동생인 정숙씨의 큰 딸이다. 23세이던 1985년 일본 도쿄 성심여대를 졸업한 뒤 한 달 만에 고(故) 조수호 전 회장과 선을 보고 한진가(家)와 인연을 맺었다. 결혼 후 20년간은 '살림'에 열중한 기간이었다. 올해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유경씨(24)와 대학 재학 중인 유홍씨(22) 등 2명의 딸을 낳아 키우며 조 전 회장의 내조에 힘을 쏟았다.
대기업 오너가의 '안주인'에서 국내 최대 해운사의 '선장'으로 변신한 것은 결혼한 지 21년 만인 2006년이었다. 지병으로 남편인 조 전 회장이 타계한 것.업계에서는 '평범한 주부'가 '경영자'로 나서는 것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해운업계 현안에 어두운 그가 한진해운의 '키'를 제대로 쥘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자신이 결코 '평범한 주부'가 아니었다며 세간의 우려를 일축했다. 학창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하고 남한테 지는 것을 싫어했던 터라 평온한 '온실 속 재벌가 안주인'으로 지난 세월을 보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반별로 바자회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 반이 1등해야 한다'며 반 친구들을 팀별 역할 분담을 해주고 이끌어 1등을 할 정도로 강한 승부근성을 보였다는 게 주위 사람들의 전언이다. 조 전 회장의 생전에도 주요 사안에 대해 조언을 하면서 경영감각을 키워왔고 30세 초반부터 50세 미만 젊은 사장들의 모임인 YPO에 가입해 20년 가까이 활동하며 다양한 재계 인사들과도 두루 친분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는 "성격 자체가 낙천적이면서도 소위 말하는 '깡이 센 편'이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울면서 당황하고 주저앉지는 않았다"며 "냉철하게 따져보고 우선순위를 정해 헤쳐나가는 편이라 경영을 맡은 뒤 차근차근 배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플라멩코 춤추며 감성경영
2008년 말 해운업계에서는 최 회장이 스페인 주 정부 관계자들을 초청한 환영행사 자리에서 스페인 전통춤인 플라멩코를 춘 사실이 화제가 됐다. 환영행사 사회자가 여흥을 위해 스페인 측 방문단에게 플라멩코를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방문단 중 10여명이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며 열정적으로 플라멩코를 춘 이후였다.
스페인 방문단 측에서 갑작스레 한진해운도 답례로 춤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최 회장은 망설임 없이 무대에 올라갔고,스페인 여성과 한 팀을 이뤄 약 2분간 춤을 따라췄다. 회사 관계자는 "한 번도 플라멩코를 춰 본적이 없는 분이 고객을 감동시키기 위해 거리낌 없이 무대에 서는 것을 보고 스페인 방문단이 크게 감동해 돌아갔다"고 전했다. 친밀한 스킨십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최 회장의 '감성경영' 진면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최 회장은 미술 등 예술을 활용한 감성경영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매년 주요 고객회사 관계자들을 상하이 비엔날레 등 미술 관련 전시회에 초청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술을 즐기지 않고,골프도 치지 않지만 업무에 지장받은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고 자신한다. 와인 1~2잔에 소주 2~3잔이 주량이라 직원들이 "회장님은 다 좋으신데 술을 못 드셔서 2% 부족하다"는 얘기를 하지만 더 많이 얘기하는 시간을 갖고 식사도 하며 직원들을 챙긴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손수 고른 초콜릿을 직원들에게 선물하고,한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을 나눠준다.
최 회장은 '여성 CEO'로 묶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여성 CEO'라고 따로 구별하면 하나의 전형성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팩커드 CEO처럼 세련되고 냉철한 여성 CEO도 많은데 천편일률적인 틀에 갇히고 싶지 않다"며 "세련된 새로운 한국의 여성 CEO로 평가받겠다"고 말했다.
◆가족은 나의 힘
최 회장은 아직도 그 날을 잊지 못한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한진해운의 경영을 맡은 뒤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지던 2007년 초.'딩동'하는 벨소리와 함께 소포가 집으로 배달됐다. 발신인은 조수호 전 회장.돌아가신 분이 보낸 소포에 놀라 포장지를 얼른 뜯어보니 최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영국 화가인 패트릭 휴즈의 작품 '허니문 인 베니스(Honeymoon in Venice)'가 나왔다.
순간 투병기간이 마지막에 다다랐던 어느 날 조 전 회장이 지나가는 말로 갖고 싶은 선물이 없냐고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별 생각없이 패트릭 휴즈의 그림을 갖고 싶다고 얘기했던 것을 조 전 회장이 기억하고 있다가 아내 몰래 작가에게 작품을 의뢰했던 것.수개월의 시간을 거쳐 조 전 회장 사후에 완성돼 배달된 그림을 보며 최 회장은 남편 생각에 한동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베니스는 부부가 신혼여행을 갔던 추억이 가득한 여행지였다.
"그 아픈 와중에도 아내를 챙기는 마음 씀씀이에 남편이 한없이 그리웠어요. 그림을 보면서 남편이 남기고 간 회사를 더 열심히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예전에는 극성 엄마였지만 지금은 딸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의지한다. 최 회장은 "경영 전면에 나선 뒤 힘이 들어 '인테리어,화장품 사업이라면 좀 더 재미있게 했을 것'이라고 푸념하자 큰 딸이 '인생이 그렇게 쉽게 가도록 다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얘기해 딸에게 한 수 배웠다"며 "딸들과도 이메일을 교환하며 서로 고민을 털어놓고 의지한다"고 말했다.
◆시련은 유능한 선원을 키우는 원동력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본사 회장 집무실에는 '잔잔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A smooth sea never made a skillful mariner)'라는 영국속담이 적힌 팻말이 놓여 있다. 최 회장은 지난 한 해를 이 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황 악화로 고생은 했지만 시련을 통해서 자신이 더 많이 공부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3년 전만 해도 '아줌마' 소리에 익숙했던 제가 이제는 동네 슈퍼에서 길을 비켜달라며 부르는 '아줌마'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회장''이사장' 호칭에 익숙해졌어요. 그만큼 저도 '경영자'로 변해가는 거겠죠.지난 한 해 많이 힘들었죠.마치 초급반 학생이 고급반으로 바로 월반한 것처럼요. 그래도 어려웠다고 절망할 수 있나요. 굴곡이 있으면 이겨내면 되는 겁니다. 제가 또 범띠 CEO잖아요. 호랑이의 기세로 올해는 흑자 전환할 겁니다. "
박민제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