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할것

10대 그룹의 한 계열사 인사팀장인 P씨.그는 신입사원 공채시즌이 끝나면 현업부서로부터 늘 싫은 소리를 듣는다. "도대체 뭘 보고 그런 친구들을 뽑았느냐"는 핀잔이다. 업무 능력은 제쳐놓고서라도 제대로 일을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얘기가 많다. 그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매년 면접 방식을 개선하고 합숙평가도 해봤지만 별 효과가 없다"고 푸념했다. 요즘 신입사원들은 학점과 영어점수 등 겉으로 드러난 조건들이 괜찮고,문서를 만들고 컴퓨터를 다루는 일에도 능숙하다. 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고,도중에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젬병'이라는 것이다.

◆학업능력은 상위권,창의력은 최하위권

한국 학생들은 국제 학력 평가에서 매번 최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2007년 '수학 · 과학 성취도 비교연구(TIMSS)'에서 한국 학생들은 수학 세계 2위,과학 분야에서 4위를 각각 차지했다. 2006년 '국제학력평가비교(PISA)'에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읽기능력은 1위,수학능력도 학년별로 1~4위를 기록했다. 고등학생의 대학 진학률도 84%로 일본(50%)과 미국(67%)을 훨씬 웃돈다.

하지만 기업과 사회가 원하는 창의력 성적은 저조하기 짝이 없다. 한국 학생들은 2007년 TIMSS 평가 결과 능동적 · 창의적 학습 수준을 측정하는 '자신감'과 '흥미도' 지수에서 49개국 가운데 모두 43위를 기록했다. 암기하고 분석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최하위권 수준인 셈이다. 이 때문에 자율적인 학습능력이 중시되는 선진국 대학에서 한국 학생들의 중도 포기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미국 아이비리그 등 명문대에 입학한 한국 학생들의 중퇴율은 44%로 유대인(12.5%),인도인(21.5%),중국인(25%)보다 훨씬 높다.

◆승자독식의 학력병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학생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제약하는 한국 특유의 '학력병' 때문이다. 학력병은 영국의 로널드 도어 교수가 창안한 단어로 '자질이나 능력보다는 학력을 앞세우는 후진국의 경쟁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은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학벌이 안정된 직장과 성공을 보장한다는 맹신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녀의 학벌을 만들어주기 위해 매년 20조원이 넘는 돈을 사교육에 쏟아붓고 있다. 20조원은 국내총생산(GDP)의 3%에 육박하는 수치로 OECD 국가 평균인 0.8%의 3배를 크게 웃도는 규모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간판을 따기 위한 경쟁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흥미,깊이 있는 생각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 오로지 결과 지향적인 경쟁구도에 창의성과 상상력이 자라날 공간은 없다. 상종렬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부모들의 기획과 관리에 따라 자라난 아이들은 자발적인 창의성을 가질 수 없다"며 "가정과 학교가 지나치게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는 생각 없는 아이들만 양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승자독식이 내면화됨으로써 경쟁대열 탈락에 따른 공포심만 커질 것이라는 얘기다.

세월 뛰어넘는 고시열풍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국가고시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예전의 위용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세상은 산업화 정보화 시대를 넘어 지식 고도화 사회로 나아가는데도 대학가의 고시 열풍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해 307명을 뽑는 행정고시에 1만4278명이 몰려 46.5 대 1의 경쟁률을,40명을 뽑는 외무고시에는 1813명이 몰려 45.3 대1의 경쟁률을 각각 기록했다. 인문학과 이공계 등에서는 학문 연구를 이어받고 실험을 함께 할 학생들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반면 서울 신림동과 노량진의 고시촌에서는 매년 수천명의 '고시폐인''고시낭인'들이 양산되고 있다.

젊은이들의 고시 쏠림 현상은 여전히 고시가 단 한번에 '입신양명'을 할 수 있는 등용문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더 굳어졌다. 정리해고와 실업에 대한 공포를 경험한 젊은이들이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도전을 하기보다는 '안전한' 고시를 더 선호하게 됐기 때문이다.

태원유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당장 고시제도를 폐지하는 게 어렵다면 점수 외에 적성검사와 면접점수 비중 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미래 공무원들은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면서 새로운 솔루션을 창출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채워야 할 것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는 당대 눈에 띄는 창의적 인물로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순풍 산부인과' '지붕뚫고 하이킥'의 연출자 김병욱 PD를 들었다. 무라카미는 "자기 언어를 가진 사람,어떤 상황에서도 변화에 반응하면서 삶을 주도해나가는 사람"이라는 평이고 김 PD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일상을 뒤집어서 보여주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이유에서다.

◆'호모 크리에이티브'

지식기반 시대에 창의적 인재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부(富)와 가치를 창출하는 원천이다. 이들은 불확실한 환경에서 돌발적으로 생겨나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능력도 탁월하다. 이 같은 '호모 크리에이티브(Homo Creative · 창조적 인간)'는 산업화시대 이윤 창출의 원동력이었던 노동계층과 부르주아들을 몰아내고 미래 사회의 부가가치를 주도적으로 창출해나갈 것이라는 진단이다.

프랑스는 대학입학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해 정치 · 사회 · 경제 등 다방면에 걸친 학생들의 독서량과 논리적인 글쓰기 실력을 평가하고 있다. 핀란드는 학교에서 영어와 국어 등 인문학은 물론 화학 물리 음악 등의 과목까지 자신의 생각과 상상력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에세이형 시험으로 학생들의 사고력과 논리력을 평가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이런 평가방식을 도입하고 있는 것은 지식기반시대에 적합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다. 전통적 인재상은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업무를 얼마나 빠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하지만 미래 인재상은 복잡한 사안을 통합하고,단순한 사안은 더욱 세밀하게 파고들어 전체에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덕목이 우선이다. 놀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노는 능력,그 속에서 최고의 창의성을 배양하고 분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인문 소양

최근에는 네트워크형 인재의 중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네트워크형 인재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조직 내부는 물론 외부와도 공유하려는 인재형을 말한다. 아무리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도 공유하지 않으면 조직의 발전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기업과 사회는 네트워크를 잘 활용하는 인재를 좋아한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자신의 분야에만 능통한 '독수공방형' 인재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경영 마인드를 가진 'T(도요타)자형' 인재를 선호하며,안철수 KAIST 석좌교수는 전문성과 함께 다른 분야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진 'A자형(사람 人의 변형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교역할을 의미)' 인재를 강조한다.

아시아인 최초로 아이비리그 총장 자리에 오른 미국 다트머스대 김용 총장은 한국이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대학이 인문학과 교양학을 통해 학생들에게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한국의 대학들도 상상력과 사고력의 기본이 되는 철학 역사 사회학 등 인문학에 대한 학생들의 욕구를 자극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 대학에서는 이미 인문학이 거의 질식했지만,기업과 사회는 인문학적 소양을 창의적인 인재의 조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윤종용 삼성전자 고문이 "미래 전자회사의 경쟁력은 음악과 미술 등에 조예가 있는 엔지니어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에 따라 판가름날 것"이라고 말한 건 이런 맥락에서다. 제품력과 디자인에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스토리를 가미하려면 예술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실패에 대한 관용

2008년 베이징올림픽 유도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최민호 선수는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 서럽게 울었다. 2004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고도 1등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냉대를 받았던 기억에 설움이 북받쳐 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은 1등이 아니거나 성공이라는 결과물을 도출하지 못한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모 개그맨이 "1등만 기억하는 드~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냈을까.

하지만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분위기는 창의적 인재들의 활동 기회와 공간을 제약함으로써 기업조직이나 공동체 전체에 큰 해를 끼칠 공산이 크다. '실패=끝'이라는 등식이 작동하는 구조 속에서 인재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치거나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진석 국민대 교수는 "패자를 수렁으로 밀어넣는 식의 제로섬 게임은 구성원들의 동료애와 연대의식을 해치게 마련"이라며 "그런 식으로 고립되고 소외된 개인들이 모인 조직(공동체)은 결코 밝은 미래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맹목적인 경쟁의식 대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인간적인 협력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포스트 인재그룹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조일훈차장jih@hankyung.com 양준영기자tetrius@hankyung.com 이태명기자chihiro@hankyung.com 조진형기자u2@hankyung.com 이상은기자selee@hankyung.com 이호기기자hglee@hankyung.com 성선화기자doo@hankyung.com 강현우기자 hkang@hankyung.com 서보미기자bm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