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사람도 그런 것인가 했다. 겉이 온화해 보이는 사람은 속이 단단하고,겉이 강해 보이는 사람은 속이 부드러운가. 키가 큰 사람은 속이 싱겁고,키가 작은 사람은 속이 짭짤한가. 이런 따위의 생각이 줄을 이었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당장에는 알 수 없었다.
사람한테는 '성품'이 있고 그 밖의 것들에는 '성질'이 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2~3년 뒤에야 안 일이었다. 사람들이 '성품'을 높임말로,'성격'을 예사말로,'성질'을 낮춤말로 쓰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은 타고난 성질을 고쳐가면서 사는 생물이라서,성질이 성격도 성품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한테만 성품이란 말을 써야 했다. 사람 사는 목적이 단순히 자기 종족 보존에만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 자신의 재주와 인격을 갈고 닦아 공명을 얻어 품을 인정받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 사람의 생김새만큼이나 성질도 재주도 삶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이른 새벽부터 푸지게도 눈이 내렸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참으로 별천지였다. 나무들을 보았다. 은행나무와 너도밤나무는 가뿐했다. 활엽을 털어 버린 뒤 쓸쓸해 보이던 가지들에 눈이 쌓여 일부러 장식을 한 듯 우아해졌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버겁다. 늘 푸르름으로 빛나던 침엽의 가지들마다 욕심껏 눈을 이고서 끙끙거리고 있다. 금세 소나무 가지 하나가 꺾어져 있기도 했다. 나무의 성질이 그대로 드러난 광경이었다. 한데 이날 정작 난리를 겪은 것은 사람들이었다. 만물의 영장이어서 겉과 속을 수없이 바꿔가면서,성질을 성품으로 격상시켜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 그토록 무기력하게 당한 것이다. 나도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이 당했다. 나무들 보기가 무참했다.
이상문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 kpma@pap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