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의 치욕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07년 4월.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에게 긴급 서신이 날아들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6개국이 참가하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일종의 첩보였다. 고종은 한 · 일 강제병합의 부당성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당시 고등재판소(平理院) 검사였던 이준을 헤이그로 비밀리에 파견했다.

이준은 러시아 황제 등에게 대한제국의 회의 참석을 주선해달라는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는 등 온갖 노력을 펼쳤다. 하지만 변방의 소국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회의가 열린 6월25일,이준 열사는 회담장 밖에서 울분을 토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계 언론들은 그조차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일부 신문만 귀퉁이에 조그맣게 처리했을 뿐이었다. 약소국의 설움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2010년 11월15일 오후 4시.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을 태운 전세기가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한다. 곧이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탄 에어프랑스 여객기가 활주로에 도착하고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만모한 싱 인도 총리 등도 우리 정부 관계자들의 영접을 받으며 비행기 트랩에서 내린다.

이날 인천공항 주변에는 청와대 경호팀을 비롯해 군인,경찰 등 수천여명의 경비인력이 출동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국제 경제질서를 논의하는 '프리미어 포럼(Premier Forum)'에 참석하기 위해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이 일제히 서울 땅을 밟는 것이다.

'G20 Seoul Summit'.바로 그 시간 서울의 경복궁 주위에도 수천여명의 경비병력이 깔린다. 정상들의 환영리셉션이 경회루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경회루 리셉션은 CNN,BBC,NHK 등 전 세계 주요 방송 등을 통해 60억 지구촌 사람들에게 생중계된다. 코리아가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 우뚝

한국은 1991년에야 유엔 가입의 뜻을 이뤄 국제무대에 본격 데뷔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지위는 여전히 초라했다. 매번 강대국들이 정해놓은 규칙과 질서를 그대로 따라야 하는 '룰 추종자(rule taker)' 신세를 면치 못했다. 쉽게 말해 뒷자리에 앉아 고개만 끄덕이는 수준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러나 G20 정상회의 유치를 계기로 위상은 180도 달라지게 됐다. 세계경제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기구로 부상한 G20의 의장국이 됨으로써,글로벌 이슈를 주도하는 '룰 제정자(rule maker)'로 입장이 바뀐 것이다.

한국은 그동안 쌓아온 실력과 경제력에 비해 국제무대에서 인지도가 낮았다. 발언권도 약했다. 때문에 이웃 일본에 지원을 부탁하는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고,일본은 이를 이용해 온갖 생색을 냈다. 여기에다 남북한 대치라는 특수 상황까지 더해져 외국인들로부터는 투자 기피 국가로 지목됐다. 이런 '컨트리 리스크'로 인해 기업들은 해외에서 경쟁 기업들보다 더 높은 가산금리를 물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이 '리더 국가'로 당당히 자리매김함에 따라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전환할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됐다.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EE)의 마커스 놀랜드 선임 연구원은 "G20 정상회의 유치는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의 시각을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라며 "한국 기업들의 세계 진출에도 엄청난 호재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코리안 프리미엄 시대

한국은 G20 정상회의 헤드 테이블의 정가운데 앉아 글로벌 이슈를 주도하고 정리하는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사공일 G20준비위원회 위원장은 "단군 이래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중심에 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좌장을 맡았다고 게임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더구나 올해 G20 정상회의에서 다뤄질 의제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이슈들이다. 한국은 주최국의 프리미엄을 살려 의제 설정과 결론 도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주도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결코 녹록지만은 않다. 20개 회원국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큰 화두로 등장한 '불균형 해소와 지속가능한 성장' 문제의 경우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해소를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 간의 치열한 기싸움이 예상된다. 미국은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중국의 위안화 평가절상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중국은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 등 국제금융기구의 지배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를 놓고도 선진국과 개도국 간 주도권 다툼이 만만치 않다. 개도국은 신흥국의 경제력 비중이 높아진 것을 반영해 지분(지분율은 곧 발언력을 의미)을 늘리겠다는 입장인 반면,영향력 축소를 우려한 선진국들은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국제적 금융안전망(safety net)을 구축하는 문제 역시 쉬운 주제는 아니다. 신흥국들은 비(非)기축통화국의 금융 안정을 위해 IMF의 기능 확대와 역내 안정망 확충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선진국들과 이해관계가 어긋날 수 있는 부분이다. 기후변화와 저탄소 · 녹색성장 문제도 골치 아프긴 마찬가지다.

작년 말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협정이 아닌 정치적 선언 수준으로 끝난 데다,핵심 쟁점인 국가별 감축 목표나 재정 지원 분담에 대한 결론도 나지 않았다. 녹색성장도 당장 경제발전이 급한 개도국들에는 한가한 이슈가 될 수 있다.

◆선진국과 개도국간 중재자 역할

따라서 G20 정상회의는 선진국과 개도국 간 가교(架橋) 역할을 천명한 한국의 조정능력을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정상회의가 어떤 성과를 거두느냐에 따라 한국의 글로벌 위상이 달라지는 구도다.

하지만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게 G20 정상회의를 준비하는 당사자들은 물론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무엇보다 타이밍이 아주 좋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예컨대 IMF 등 국제금융기구 지배구조 개혁의 경우 개도국과 선진국 간 입장차가 아직 존재하지만,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때는 결론을 맺을 가능성이 높다. IMF 쿼터 개혁 문제가 대표적이다.

작년 피츠버그 정상회의 때 IMF 지분 과다보유국(선진국)의 쿼터 중 5%포인트 이상을 과소보유국(신흥 개도국)으로 넘기자는 원론에는 합의했지만,국가별 쿼터 조정 등 구체적인 방안은 추후 논의하기로 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올해 말 G20 정상회의에서 어떤 형태로든 결론이 날 것이라는 게 G20준비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불거진 은행에 대한 자본규제 등 금융규제 이슈도 IMF가 2011년 이전까지는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기로 한 만큼 11월 G20 정상회의가 결론을 맺을 적절한 시점이다. 개도국과 선진국 간 이해가 엇갈리는 기후변화와 녹색성장 이슈도 우리가 중재자 역할을 잘 해낸다면 충분히 성과를 도출할 수 있다.

신제윤 기획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차관보)은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는 개별 의제에서 회원국 간 입장차를 좁혀 얼마나 많은 결론을 이끌어내느냐에 달려 있다"며 "이런 측면에서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는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코리아 이니셔티브' 주목

특히 올해 G20 정상회의에서 주목해야 할 의제는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이다. 현재 국제기구에서 논의되고 있는 글로벌 금융개혁과 관련,초안 수준의 로드맵에 기초해 보면 11월 서울 정상회의에서는 위기 재발 방지 대책과 위기 이후 안정망 구축이 핵심 의제로 등장할 것이 유력시된다. 구체적으로는 일부 신흥국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국제 자본이동성 규제 문제,위기 재발시 취약 국가에 대한 역내 상호 금융 지원체계 구축 등이 주요 논의 대상이다.

이들 의제는 리먼 브러더스 파산과 같은 사례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개도국의 디폴트(채무불이행)로 이어지는 지금의 국제 금융시스템 불안정성을 개혁하자는 것으로,특히 개도국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더구나 이들 이슈는 한국 정부가 국제무대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높여왔던 사안들인 만큼 한국이 의제를 주도해 '코리아 이니셔티브(Korea Initiative)'를 거머쥘 절호의 기회다.

한국은 특히 최근 '아세안+3(한국 · 중국 · 일본)'의 역내 상호 자금 지원체계이자 일종의 '아시아판 IMF'인 'CMI(치앙마이 이니셔티브)' 출범을 주도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는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 이슈에서도 우리가 논의를 주도해나가는 데 밑바탕이 될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이다.

이처럼 외부 환경이 아무리 우호적이라고 해도 우리 스스로의 '내부로부터의 개혁' 없이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게 없을 것이란 목소리도 높다. 이대기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법 윤리 정치문화 시민의식 문화예술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수준을 높이려는 자발적 노력이 수반돼야만 진정한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종태/박성완 기자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