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보다 2~3% 정도 매출이 늘었습니다. 시장 상황을 감안할 때 선전한 것입니다. 올해 미국의 예상 GDP(국내총생산)성장률이 얼마인 줄 아세요. 0.6%입니다. "

2011년 11월.글로벌 기업인 A전자의 해외법인장 경영전략회의.미국 법인장은 매출 증가세가 왜 둔화됐느냐는 경영진의 지적을 GDP 탓으로 돌린다. 이번에는 화살이 중국법인을 향했다. 휴대폰 시장 점유율이 1년 새 반토막이 난 이유를 추궁받은 중국 법인장은 "중국 정부가 현지 기업들에만 보조금을 몰아줘서…"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노사담당 임원은 "내년에는 상당폭의 임금 인상이 불가피할 것 같다"는 내용을 보고 한다. "최근 1~2년 동안은 사내에 돌았던 생산시설 중국 이전설 덕에 노조로부터 손쉽게 임금 동결 동의를 받아냈지만 더 이상은 어렵다"는 설명이 곁들여진다. 중국 정부가 보호무역 쪽으로 방침을 바꾸면서 외국 기업의 생산시설 이전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노조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CEO(최고경영자)는 한숨을 내쉰다. "내년에는 제품 출시까지 3년 이상 걸리는 중장기 투자 계획은 모두 홀드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회의가 마무리된다.

◆경기침체 국면은 마무리되고 있지만…

전문가들의 전망을 토대로 내년 말,사면초가의 상황을 맞은 한 글로벌 기업의 이야기를 가상으로 꾸몄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부정적 산업 전망이 나오는 것은 경기침체와 맞물려 글로벌 산업 질서가 급변하고 있어서다. 변화의 흐름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면 A전자와 똑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최근 발간한 '두 속도 세계'라는 보고서를 통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시장의 성장 속도 차이가 한층 뚜렷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또 고성장 개도국들이 빠른 속도로 선진국들을 추격,글로벌 산업 지도에 큰 변화가 올 것으로 예측했다.

BCG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분석도구를 활용해 세계 각국의 2010~2015년 GDP 성장률을 계산했다. 그 결과 선진시장으로 분류되는 미국과 유럽,일본의 연 평균 GDP 성장률은 2%를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중국,인도 등은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할 것으로 전망했다. 두 나라의 연 평균 GDP 성장률은 각각 8~9%,6~7%로 점쳐졌다. 러시아는 브릭스(BRICs)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금융위기 이전의 절반 수준인 3%대의 저성장에 빠질 것으로 예측했다.

박상순 BCG 서울사무소 이사는 "대다수 선진국은 '뉴 노멀'이라는 새로운 저성장의 시기에 돌입했다"며 "선진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한 기존 글로벌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격전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위협 요인들

BCG는 선진국 경제 성장률이 떨어지면 기업 조직 내에 수세적 태도가 만연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적극적으로 경쟁자들의 시장 지분을 빼앗으려하기 보다 왜 성장이 어려운지를 장황하게 설명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단기 실적주의가 강화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상대적으로 성장률이 높은 신흥 시장은 현지 기업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주요 개도국 정부가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자국 기업들을 지원할 것이라는 게 BCG 측 설명이다.

보호주의가 강화되면 노사관계에도 불똥이 튄다.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할 수 있다는 압박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인구보다는 고령으로 인해 탈퇴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지는 현상도 노조의 위상이 높아지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할 전망이다. 노동 인력의 감소는 사용자보다는 노조의 입지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두 속도의 세계' 속 생존법은

BCG는 기존 글로벌 기업들이 지속적인 성장을 하려면 성장성이 높은 지역에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업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개도국 기업들의 혁신 전략을 연구하고 시장 창출전략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서는 개척정신을 북돋는 리더십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양한 실험적 프로젝트가 시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영웅적 실패'에 대해서도 합당한 보상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조직 운영 면에서는 현지 정부와의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대관 분야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경기침체를 계기로 일상적인 경제 활동에 각국 정부가 개입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서다. 노무관리도 한층 중요해질 전망이다. 직원들의 애사심을 고취시키는데 실패하면 노사 갈등과 인력 이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BCG는 단기 목표 달성 여부에 따라 인센티브를 지급했던 기존 보상 체계에 메스를 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속 가능한 장기적 가치를 창출하는 직원들에게 보다 많은 보상이 이뤄져야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