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원자 온실에서 시험한 결과 복숭아를 땅에 심어서 이것이 움트고 잎이 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가 익는 데까지 15분이 걸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

1955년 국회에서 어느 의원은 이렇게 발언했다. 당시 한국 지식층이 갖고 있던 원자력 또는 과학에 대한 초라한 이해 수준을 보여준다. 그 지경이던 한국이 반세기 만에 원자력발전소를 외국에 수출하게 됐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출동해 이룩한 한국형 원전의 수출 대상국은 아랍에미리트인데,그 토후국 중 한 곳인 두바이에서는 지난 4일 세계 최고층의 건물이 개관됐다. 828m 높이의 '부르즈 칼리파'는 한국의 삼성물산이 시공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바로 지난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전자쇼를 주도한 것도 한국이었다.

최근 20일 사이의 보도 몇 자락만으로도 우리는 한국 기술의 현주소를 읽을 수 있다. 꼭 100년 전 식민지로 전락했던 '조선'이 바로 오늘의 '한국'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지경이다. 1세기 전 일본은 이미 선진국 대열에 있었고,조선은 가장 후진국 중 한 곳이었다.

'후진국 조선'은 식민지 시대(1910~1945년)와 한국전쟁(1950~1953년)을 거친 전(前) 반세기 뒤에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랬던 나라가 후(後)반세기 만에 놀라운 '한국'으로 탈바꿈했다. 한국은 이제 세계의 선진 대열에 발돋움하고 있으니,이런 경우는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지금 수출하게 된 원자력 기술은 바로 한국의 반세기를 대표하는 과학기술이다. 한국이 원자력에 눈뜬 것은 1953년 휴전 직후 참담하던 시기의 일이었다. 바로 그해 말 미국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 for Peace)'계획을 발표했다. 그 덕택에 전쟁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던 한국 젊은이들은 처음으로 원자력 분야를 포함한 현대과학에 눈 뜰 기회를 얻었다. 원자력을 과신했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열성과 미국의 원조가 어우러져 수많은 과학도가 미국 등에 파견됐다. 1956년 시작된 한국의 원자력 유학생은 1963년까지 모두 189명이었다. 여기에 개인 유학생도 상당수 과학기술을 배우러 떠났다.

일제 시기 일본에 유학해 이공계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모두 쳐야 겨우 204명뿐이었으니,이 정도면 당시 원자력 유학생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 한국 과학기술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초기 유학생 덕이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당시 최고의 과학기술 능력을 갖추고 귀국해 1960년대 이후 한국 과학기술 성장에 제 몫을 다하게 됐다. 고리에 첫 원자력발전소를 지은 것은 1978년인데,바로 그런 인재들이 수입해 온 원자력발전소를 실험하고 공부하고 연구했고,그렇게 쌓아온 원자력발전의 노하우를 이제 아랍에 수출하게 된 셈이다.

며칠 뒤 나는 두바이로 간다. 은퇴 이후 가끔 여행을 다니지만,이번은 좀 각별하다. 우리 일행 16명은 두바이에서 지난 4일 개관한 부르즈 칼리파 전망대에 오를 예정이다. 아랍여행은 처음인데다,그것을 최근 한국과 관련된 두바이에서 시작하는 것도 감회를 더해 준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감상 저편에는 두 가지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 이처럼 한국의 기술은 발달해 왔지만,과학 수준은 아직 한참 모자란 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자란 과학은 앞서가는 기술의 덜미를 잡을 것이 뻔하니 그것이 걱정이다. 또 이렇게 우리 기술을 통해 가까워지고 있는 아랍세계의 역사 · 문화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지하니 그것도 근심거리다. 이 무지는 결국 우리 기술의 진로를 막아 한국 경제의 성장을 방해할 것이니 말이다.

결국 정치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줘야겠는데,우리 정치력은 그에 한참 못 미치는 듯하니 그것이 더욱 한스럽다.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