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대신 알약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건강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나는 이런 생각을 40대까지만 해도 자주 했었다. 하는 일이 몹시 바쁘거나 밥 먹는 일이 번거롭게 여겨질 때였다. 이 이야기를 어느 모임에서 했더니 20여명의 30,40대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고 해서 놀랐다.

영화 '아바타'의 기세가 무섭다. 국내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곧 최단시간 최고 흥행기록을 세울 것이라 한다. 게다가 앞으로 그 영향이 TV까지 미쳐 대단할 것이라고 한다. 나도 입체(3D) '아바타'를 봤다. 이제까지 본 영화들과 달리 배우들의 움직임은 물론 미묘한 감정까지 캐릭터에 담아낸 최첨단 영상 기법으로 만들었다. 스토리 전개 방식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스크린 앞으로 끌어들일 만했다. 그런데 극장을 나서는 마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밥 대신에 먹을 수 있는 작은 알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소설가들은 책을 내서 독자들을 감동시켜 그 대가를 얻는 데 목적을 갖고 있다. 나도 다른 직업을 갖고 있긴 해도,그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소설가들이 날로 발전해가는 영상산업과 힘겨운 경쟁을 벌여온 것은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다. 사람들이 영상에 매료돼 가면서 소설책을 점점 멀리한 것이다. 그 이유는 순전히 편의성에 있다는 생각이다. 10시간쯤 혹은 100시간쯤 읽어야 할 내용을 한두 시간 편히 앉아서 눈으로 뚝딱 봐버릴 수 있고, 읽고 머리로 상상하며 그려볼 필요 없이 곧장 눈앞에서 사실처럼 펼쳐지는 상황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좋은 소설이 좋은 영상이 된다고 한다. 국내외에서 이미 성과를 얻은 소설들이 영상화한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다. 얼마간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얼마간의 사실마저 이미 과거사가 돼 가고 있다. 제작이 편하도록 쓴 시나리오나 대본이 영상화하는 것이 현실이고 또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더러는 근래에 다투어 쏟아져 나오는 전자책이 출판은 위축시켜도 소설의 수요를 증가시키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러나 소설을 점점 읽지 않는 세상에서,소설가가 점점 왜소해져 가는 세상에서 전자책의 생명이 어디까지일지….냄새까지 맡을 수 있는 4D 영화의 개발도 멀지 않았다고 하는 터에 말이다.

끼니마다 밥을 챙겨 먹는 일이 귀찮을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 때문에 언젠가는 사람들이 아예 성의 있게 차린 밥상을 앞에 두고 앉아 여유와 기쁨을 맛볼 수 없게 돼 버린다면 어떨까. 소설책을 읽는 일이 그와 같을진대 한사코 편의성만 좇는 세상이 안타깝다. 편의성은 매혹적인 알약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 알약이 외골쑤의 사람들,내 앞만 보고 사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만들어낼 것만 같다. 종이로 된 소설책을 한쪽 한쪽 넘겨가며 읽는 재미,그 내용이 눈에서 머리로,머리에서 다시 가슴으로 와서 혹한의 화톳불처럼 타오르는 느낌을 잊는다면 세상은 사막이 될 거란 생각이 든다.

이 상 문 < 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 · 소설가 · kpma@paper.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