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100년전 서울 맛집은…남문밖 설렁탕·화동 황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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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서울
강명관 풀어엮음 | 푸른역사 | 456쪽 | 2만3000원
강명관 풀어엮음 | 푸른역사 | 456쪽 | 2만3000원
경주가 그런 것처럼 서울도 '문화유적의 보고(寶庫)'라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서울시청 신축공사 현장에서는 지난해 11월 조선시대 군기시(무기제조창)터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이 대거 확인됐고,청진동 · 피맛골 일대 재개발 현장에서도 시전 행랑터와 백자 달항아리 등이 잇달아 발굴됐다.
하지만 이렇게 발굴하지 않는 한 땅 위에서 옛 서울의 모습이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고궁과 종묘,능원,동대문(흥인지문),남대문 등을 빼면 600년 고도(古都)임을 보여줄 만한 것이 드문 탓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진 1910년부터 서울이 옛 모습을 잃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1910년을 기점으로 일본인의 손에 의해 없던 길이 뚫리고 수백 년 묵은 궁궐과 관청,성벽이 헐려나갔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동리의 이름이 바뀌고 주거지의 성격도 달라졌다.
각종 신문 · 잡지에 서울 관련 특집기사들이 종종 실린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옛 서울의 정감 어린 모습이 하나둘 사라지자 기록으로 남겼던 것.
《사라진 서울》은 이때부터 해방 전까지 《개벽》《별건곤》《조광》《매일신보》 등에 실린 서울 관련 기사들을 토대로 당시의 서울 풍경과 사람,풍속,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소의문(서소문)은 지난날 중죄인의 참수장이 그 문 밖에 있었으므로 사형에 임한 사람을 '서소문참(西小門斬)'이라 하였다. 근래 광무 10년(1906년) 한국 군대를 해산할 때에는 이 문 안에 있던 시위대와 일본 군대 사이에 충돌이 생겨서 양방에 다수 사상자가 생기고,일본 수비대의 미원(梶原) 대위가 또한 죽었으니,지금까지 민관에서 '서소문접전'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별건곤》1929년 10월호,'경성 팔대문과 오대궁문의 유래')
또 이중화(1881~?)가 《별건곤》에 기고한 '경성 시전의 변천'에는 종로 대로 좌우에 있던 우산전,생선전,사기전,치계전(雉鷄廛),연죽전(煙竹廛),의전,잡곡전 등 수많은 가게의 이름을 빼곡히 순서대로 열거해 놓았다. 조선 500년간 시전은 영업장소를 변경하지 않고 일정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시전이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시전은 한일강제병합 이후 급속히 몰락했다. 1916년 2월24일부터 매일신보에 8회 연재됐던 '상계(商界)의 금석(今昔)'은 시전에 즐비했던 가게들의 신세타령을 통해 시전의 몰락상을 전해준다.
"나는 청포전(靑布廛)이오.지금 사람들은 나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많으며,또 종로 종각 동편 모퉁이집이라면 알아도,청포전이라면 아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네.또 신설 상전 모자부는 알며,재봉소와 양말제조소는 알아도 이 집이 청포전집인 줄은 아는 사람이 많다 하기 어렵게 되었네."
세력 중심의 이동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개벽》 1924년 6월호에서 김기전은 "경복궁에서 기적에 깬 해태가 울고,창덕궁에서 철창에 갇힌 호랑이가 운다. 경성의 만인이 두 궁을 쳐다보던 때도 어느덧 옛 꿈이고 오늘의 정치 중심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조선총독부이다"라고 했다.
서울의 주요 명승지와 명물 100곳을 소개한 '경성백승(百勝)도 재미있다. 종로의 종각,공평동의 재판소,수송동 기마대 등이 '동네 명물'로 꼽혔는데 원동(현재의 원서동)에선 '여간 주제 넘지 아니하여 계동 모기와는 혼인도 아니했던' 모기가 명물로 선정됐다.
또 '남문밖 잠배 설렁탕''샌전 이일옥 설렁탕''화동 막바지 황추탕집' 등 100년 전의 '맛집'과 선술집도 소개하고 있으니 오늘 신문에 실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바로 미래의 역사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