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개봉된 영화 '리틀 애쉬(Little Ashes)'는 스페인 출신의 두 예술 거장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년)와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년) 사이에 있었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다. 두 사람은 국립 마드리드대학에서 첫 만남을 가진 이후 서로의 예술 세계에 대해 큰 영향을 끼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나갔다.

국내에도 문학과 미술의 경계에서 '예술의 꽃'을 피워내는 화가들이 적지 않다. 중견 화가 황주리씨(52)가 대표적이다. 그는 소설과 수필을 쓰면서 강렬한 스토리텔링 화풍(스토리 아트)을 선도해 온 대표적인 크로스오버 작가다. 문학적 상상력이 그의 붓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평가다.

그는 30여년간의 화업과 함께 《세월》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어있다》 등 산문집 5권을 출간한 데 이어 작년 8월부터는 문학 웹진 '나비'에 '네버랜드 다이어리'라는 주제로 인터넷 단편 소설을 연재하며 10만명의 네티즌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출판사를 경영하던 아버지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책벌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황씨는 "문학적 상상력과 회화적 상상력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내 마음 속의 기계들이다. 하지만 그 두 기계는 서로의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데 상호협조적"이라고 강조했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외적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것이니 만큼 서로의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황씨는 "실제 시나 소설을 읽으면 색이 보이고 색을 보면 문학적인 상상력이 발동한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문학적 감성이 많은 도움을 준 게 사실이지만 최근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회화적 상상력 역시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어요. 같은 풍경을 그림으로 그릴 때와 글로 쓰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지만 두 가지 일은 내게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

그는 그림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유에 대해 "문학과 미술은 표현 수단만 다를 뿐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말을 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초기 화면이 원고지 형태의 사각 틀을 기본 구도로 했다면 최근에는 살아 움직이는 식물로 바뀌었습니다. 일상의 풍경을 담은 '식물학' 시리즈 등 원색 그림들은 제가 대여섯 살 때부터 그려온 익숙한 것이고요. 그 사소한 일상들이 가득 모여 국가,세계,우주로 번식하는 식물학의 세계는 '문학의 탯줄'로 이어진 인간에 관한 연구입니다. "

그에게 이처럼 그림은 의식 또는 무의식의 심부(深部)로부터 길어 올리는 '문학적 감성의 두레박'이다.

그동안 시각과 문학적인 공감각을 경험했던 그는 "모든 예술 작품은 우주가 창조되듯이 서로 다른 세계들이 충돌함으로써 작품이 생성된다"며 "예술 작품이 탄생하는 것은 마치 세상이 최초로 창조되는 것과도 같다"고 덧붙였다.

"사소한 일상의 흔적들이 모여 거대한 삶의 보자기가 짜여집니다. 그 보자기를 한꺼번에 확 풀면 우리들 삶의 풍경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쏟아지지요. 그 속에는 문학과 미술이 공존하지만 제 그림을 스토리아트라고 정형화하는 것은 그다지 달갑지는 않아요. 무엇보다 제게는 그림을 그리는 게 본업이고, 글을 쓰는 일은 휴식이니까요. 어쩌면 저는 의식적이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타고난 문화인(文畵人)이 아닌가 싶어요" 그는 오는 5월 서울 신사동 갤러리 현대 강남점에서 여는 개인전에 문학적인 요소와 시각적인 테마가 한층 심화된 신작 80여점을 걸 예정이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