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 최대 휴대폰 서비스회사 창구에서 답답한 일을 겪었다. 계약자 변경 때문이다. 내가 사용하는 회사 휴대폰 계약자는 전임 특파원이다. 그 휴대폰을 그대로 받아 쓰다 단말기 교체를 위해 계약자를 나로 바꾸려는데 창구 직원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계약자를 변경하려면 기존 계약자의 일본 신분증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들고 간 한국 여권 사본으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귀국한 전임 특파원이 일본 신분증을 갖고 있을 리 없다. 사정을 설명하고 "휴대폰 실제 사용자이자 요금 지불자인 내가 계약자가 되는 게 당신 회사에도 유리하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규정상 안 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나 같은 외국인 고객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은 회사 규정도 문제지만 융통성 없이 규정만 따지는 직원을 보며 일본 기업의 한계를 느꼈다. '이래서야 변화무쌍한 글로벌시장 니즈에 대응할 수 있을까….'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 전자전시회(CES)에서 "일본 기업이 신경은 쓰이지만 겁은 안 난다"고 말했다. 이례적으로 일본 기업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삼성전자가 작년 3분기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9개 전자회사를 합친 것보다 영업이익을 더 많이 낸 만큼 그 정도 자신감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던 일본 기업이 겁나지 않게 된 데는 글로벌화의 힘이 컸다는 생각이다. 오늘의 삼성전자를 만든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의 요체는 글로벌화였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쇼크 이후 각국 기업이 고전할 때 현대자동차가 거의 유일하게 자동차 판매를 늘리고 삼성전자 LG전자가 약진할 수 있었던 것도 일찌감치 중국 인도 등 신흥국에 진출했던 글로벌화 덕분이다.

한국 기업에 글로벌화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국 인구는 4875만명(2009년 추정)으로 기업들이 안정적 수익을 낼 수 있는 최소 내수시장 규모인 1억명의 절반도 안 된다. 한국 기업이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글로벌화에 매진했던 이유다. 반면 일본 기업엔 결코 작지 않은 내수시장이 있었다. 일본 인구는 1억2793만명으로 한국의 2.6배다. 국내총생산(GDP) 규모로는 한국의 4.5배다. 굳이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먹고살 만한 시장 규모다. 한국에선 글로벌 플레이어만 살아남은 데 반해 일본엔 TV를 만드는 가전회사가 9개,자동차사가 10개나 있는 것도 그런 연유다.

최근 한국과 일본 기업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는 흥미롭다.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주창한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한 기업인은 일본이 36%에 그친 데 비해 한국은 78%에 달했다. 글로벌화에 대한 양국 기업의 자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 기업에 뒤진 일본 기업들이 지금 쓰고 있는 반성문의 주제도 글로벌화다. 올해 주요 일본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한 신년 화두는 '신흥국'과 '환경'이다.

일본이 앞선 환경기술을 무기로 한국 기업들이 미리 진출한 신흥국을 공략하겠다는 얘기다. 급성장하는 신흥국을 한국 기업에 이대로 내줬다간 살아남을 수 없는 위기감에서다. 일단 문제의 핵심은 파악한 일본 기업들이지만 얼마나 철저히 글로벌화해서 유연하게 시장변화에 대응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도쿄=차병석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