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봄 사우디 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서른 살 한국 청년이 큰 길가에 자동차를 세워놓은 채 지나가는 차량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몇시간째였다. 이윽고 알루미늄 바를 가득 실은 트럭이 시야에 들어오자,청년은 나는 듯이 자신의 차로 뛰어들었다.

두 시간쯤 달렸을까. 트럭이 멈춰선 건물로 청년도 따라 들어갔다. 영어와 아랍어를 구사하는 파키스탄 출신 통역이 뒤를 따랐다. 얼마 전 청년이 자신의 봉급을 털어 고용한 현지인이었다. 트럭 운전사로부터 알루미늄을 건네받은 현지 상인을 앞에 놓고 청년이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이 알루미늄을 어디서 가져온 겁니까. 얼마에 산거죠? 아…,수입상을 거치다보니 이렇게 질 낮은 제품을 비싸게 샀군요. 저는 한국의 율산실업에서 일하는 박기석입니다. 앞으로 율산의 알루미늄을 직수입하시죠.품질 좋은 제품을 훨씬 싸게 드리겠습니다. "

현지 수입업자 리스트조차 없는 상황에서 부임한 박기석은 이런 식으로 그 해 1700만달러어치의 알루미늄을 사우디 아라비아에 수출했다. 그 전까지 율산이 단 한 번도 거래하지 못했던 신시장을 입사 2년차 풋내기 사원이 열어젖힌 것이다.

국내 최대 전시 · 컨벤션 업체인 시공테크 박기석 회장(62)에게 주어진 환경은 언제나 이랬다. 선례도 없었고,조언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에겐 '최초'란 수식어가 여러 개 붙어다닌다. 88 서울올림픽 때 국내 최초로 레이저 쇼를 선보였다. 보수적인 박물관에 멀티미디어와 각종 작동 모형,영상시스템을 도입해 '체험형 관람'으로 바꿔놓은 것도 박 회장이었다.

'맨 땅에 헤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박 회장의 도전 정신은 22년 전 탄생한 '정체 불명의 회사' 시공테크를 연매출 1000억원(계열사 포함)짜리 기업으로 키운 비결이었다.

◆가난은 상상력을 가져다 주고

박 회장은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세 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가난과 궁핍이 가장 잃은 집안을 지나칠리 없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아버지가 계시지 않다는 이유로 좌절하거나 방황했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며 "되돌릴 수 없는 일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알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중 · 고교 시절엔 소설책에 파묻혀 살았다. 춘희,노인과 바다 등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책을 닥치는대로 섭렵했다. 가정 형편상 대학 입학은 진작에 포기했던 터.이때가 박 회장의 일생에서 가장 여유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자유시간'이 대학 진학의 꿈을 다시 불어넣은 것은 아이러니다. 독서를 통해 사고의 폭을 넓혀 나가면서 '대학을 포기하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하지만 도저히 형편이 안돼 고려대 생물학과에 합격하고도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결국 고교 졸업 후 3년 만에 같은 학교 독문과에 합격한다.

박 회장은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더라면 대학입시를 준비하느라 마음 편히 책 읽고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때의 경험이 훗날 상상력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전시 산업에 매료된 '탱크'

박 회장은 철책선에서 군 생활을 했다. 기갑학교를 나와 15사단 전차중대에서 탱크를 운전했다. '탱크'란 별명은 이때 붙었다. 단단한 체구,한번 마음 먹으면 성과가 나올 때까지 밀어붙이는 집념이 탱크 운전병 출신이란 독특한 이력과 맞물리면서 생긴 별명이었다.

'월급쟁이' 박기석의 운명을 바꾼 것은 1970년대 말 율산의 부도였다. 1년 동안 빈 사무실을 지키며 방황하던 박 회장이 내린 결론은 '내 사업을 하자'였다. 알루미늄을 팔던 경험을 살려 한국 일본 미국 유럽의 건축자재를 중동지역에 판매하는 중계무역을 시작한 것.사업 시작 6~7년 만에 당시 돈으로 20억원 이상을 벌었다.

하지만 오일 달러로 버티던 '중동 붐'이 한풀 꺾이고 시장 경쟁도 격화되자 1987년 주저없이 발을 뺐다. 사업을 접은 또 다른 이유는 자재를 구입하러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드나든 테마파크와 박물관,과학관에서 겪은 '문화적 충격' 때문이었다.

"1982년께 시카고 사이언스 뮤지엄을 방문했어요. 컴퓨터에 'Park Ki Seok'을 입력하자 로봇이 해당 알파벳을 차례로 집어들며 제 이름을 쓰는 겁니다. 깜짝 놀랐죠.'우리나라엔 왜 이런 과학관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해외 박물관과 테마파크 방문 횟수가 늘면서 '내가 이런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

◆준비한 자에게 기회는 온다

의욕은 넘쳤지만 당시엔 개념조차 생소했던 전시사업을 일으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울올림픽 때 선보인 레이저 쇼로 스타가 됐지만,수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억원으로 시작한 사업자금은 4년여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처가 집까지 저당잡힌 상황.하지만 박 회장은 자신만만했다. '경제가 발전하면 전시산업은 그에 비례해 성장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는 오히려 "기회가 올 때 남들보다 훨씬 잘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많이 보고 많이 배워야 한다"며 해외에 대형 박물관이나 전시관이 들어설 때마다 반드시 임직원들을 내보냈다. "돈 걱정 하지 말고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잡지나 서적을 무조건 한 권 이상 사오라"는 주문과 함께.

이때부터 구독하기 시작한 '더 퓨처리스트''아트&사이언스' 등 60여종의 전시관 및 미래산업 관련 전문잡지와 수천권에 이르는 전문 서적들은 박 회장을 비롯한 시공테크 임직원들의 '아이디어 뱅크'로 활용됐다.

박 회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1993년 대전엑스포 이후 전국에 박물관과 전시관,체험관 설립 붐이 일어난 것.전시관 내부를 기획하고 꾸미는 일은 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무장한 시공테크에 돌아갔다. 서울역사박물관 포스코박물관 공룡전시관 국립과천과학관 등 868개 전시관과 박물관이 시공테크의 손을 거쳐 일반에 공개됐다. 박 회장은 "기존 업체들이 단순히 내부 인테리어를 꾸미는데 그친 반면 시공테크는 해외 출장과 전문 서적을 통해 얻은 앞선 정보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시관 구성을 주도한 점이 달랐다"고 말했다.

◆도전은 계속된다

요즘 박 회장은 교육미디어 사업에 푹 빠져 있다. 시공테크 자회사인 시공미디어가 작년 초 내놓은 '아이스크림(i-scream)'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PC와 연결된 TV 화면을 통해 지진 발생 원리나 곤충의 탈바꿈 과정 등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보면서 배우도록 설계된 이 프로그램은 박 회장이 세계 최초로 선보인 작품이다.

아이스크림의 출발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공테크가 축적한 교육용 사진 300여만장을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끝에 교육미디어 콘텐츠로 써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것.여기에 KBS와 영국 BBC 등이 만든 동영상을 더해 살을 붙이기로 했다. 하지만 주변 반응은 싸늘했다. 10년 동안 아무런 매출 없이 300억원에 육박하는 투자비를 잡아먹는 사업 모델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보란 듯이 성과를 냈다. 출시 첫해인 지난해 전국 초등학교 학급의 75%를 유료 회원으로 끌어들이며 130억원의 매출을 올린 것.유료 콘텐츠에 냉담한 한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난 20여년간 끊임 없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온 박 회장의 창의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올까. "머리 좋은 사람만이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창의력은 후천적으로도 길러집니다. 예컨대 인터넷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관련 책을 10권 정도 읽고나면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게 되죠.그러다보면 내 주변,내 업무에 이런 지식을 적용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잘 안된다고 포기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해요.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고민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래,바로 이거야'를 외치게 될 겁니다. "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