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과점의 조각케이크,칸칸이 나뉜 냉동실 얼음틀,TV홈쇼핑의 할부 프로그램….'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사례들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아이디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하나다. '분할'이다.

제과점은 케이크를 작은 조각으로 나눔으로써 케이크가 먹고 싶지만 큰 케이크를 사기에는 부담스러운 싱글족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였다. 냉동실의 얼음틀에 적용된 원리도 흡사하다. 큰 덩어리의 얼음을 쪼개야 하는 불편함을 덜기 위해 작은 얼음들을 만들 수 있도록 얼음틀 모양을 바꾼 것이다. 유통업체들의 매출을 끌어올린 일등공신인 할부 프로그램도 '나누기'라는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매달 나눠서 돈을 내는 방식을 고안,지갑이 가벼운 소비자들을 흡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메이드인 코리아'엔 트리즈가 있다

러시아 학자 겐리히 알츠슐러는 "세상을 바꾼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1946년부터 17년 동안 러시아 특허 20만건을 분석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다양한 분야에서 쏟아져 나온 기술의 밑바탕에 있는 아이디어 패턴이 수십 가지에 불과했던 것.그는 가장 많이 활용된 아이디어 패턴 40개를 뽑아내 '트리즈(TRIZ)'라는 이론을 정립했다. 새로운 사물이나 프로젝트를 대할 때 40가지 원칙을 떠올리면 경쟁자들이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이 이론이 발표된 지 40여년이 지난 지금.알츠슐러 박사의 '창의력 공식'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나라는 한국이다.

1998년 이 이론을 도입한 삼성전자는 트리즈를 응용한 R&D(연구 · 개발) 활동을 통해 매년 180여건의 특허를 출원하고 있다. 이미 50% 이상의 연구원들이 트리즈 교육을 마쳤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이 회사의 대표적인 트리즈 응용 사례로 저소음 드럼세탁기를 들 수 있다. 이 회사 세탁기팀은 드럼세탁기로 탈수 작업을 할 때 소음이 크다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회전하는 드럼을 지지하는 플라스틱 재질의 터브가 문제였다.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 부품을 요철 형태로 만들어야 하지만 울퉁불퉁할수록 공기유동 소음이 커졌다. 세탁기팀은 트리즈의 '분리의 원리'에서 해답을 찾았다. 강도를 높이는 부분과 소음이 발생하는 부분을 나누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기술은 현재 삼성전자의 모든 드럼세탁기에 적용돼 있다.

◆관점을 바꿔야 모순이 풀린다

LG전자도 2005년 생산성연구원 내에 트리즈 전담조직을 설치,원가를 줄이고 공정을 혁신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을 수행하고 있다. 이 회사는 냉장고 문이 잘 닫히고 밀폐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석이 강해야 하지만 너무 강하면 문을 여는 것이 불편해지는 딜레마를 트리즈로 풀었다.

트리즈의 '비대칭 원리'를 활용,자석의 단면을 비대칭형으로 교체한 것.자석의 전체 면이 아닌 한쪽 부분이 먼저 떨어지도록 고무자석의 구조를 바꾸자 밀폐 기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문을 여는 데 필요한 힘은 25%가량 줄었다. 현재 이 회사의 모든 양문형 냉장고에는 비대칭 고무자석 기술이 쓰인다.

포스코는 철강재 원료를 임시로 보관하는 사일로의 낭비 요소를 트리즈를 활용해 제거했다. 높은 곳에서 원료를 떨어뜨릴 때 발생하는 충격으로 전체 원료의 30%가량이 잘게 부서진다는 게 이 회사가 안고 있는 문제였다. 포스코는 '중간매개물의 원리'를 적용,16개의 사일로 사이를 막고 있는 격판에 구멍을 뚫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이 기술을 통해 원료 손실 비율이 30%에서 10%로 줄어 연간 62억5000만원의 비용을 절감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트리즈가 세금도 줄인다

공공부문에서도 트리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서울시 암사정수장은 산업용 오염물질을 걸러내는 여과포를 청소하기 위해 물을 분출하는 노즐이 100개가량 달려 있는 대형 세척기를 사용해왔다. 세척기는 하루에 1000t가량의 물을 썼다.

정수장 직원들은 세척용수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트리즈의 '역동성의 원리'를 찾아냈다. 노즐을 1개로 줄이는 대신 노즐을 움직이게 하면 물을 덜 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움직이는 노즐이 달린 세척기는 하루 50t의 물로 기존 세척기의 역할을 해냈다. 암사정수장의 세척기는 서울시의 창의시정 우수사례 중 하나다.

이경원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점진적인 개선이 가져오는 효과는 5~10% 정도에 불과하지만 관점을 바꾼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2~3배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며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과 공공부문도 트리즈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