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술을 마실 겁니다. 술은 용기를 주거든요. " 지진 대참사 발생 일주일째인 18일.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콧수염 위에 치약을 바른 한 남자가 깨진 술병을 부여잡고 술주정을 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시신 한 구가 놓여 있고 사방에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 컵의 물과 한 톨의 식량이 아쉬운 가운데 부패한 시신의 악취를 줄이기 위한 치약과 현실 도피를 위한 럼주가 아이티 이재민들의 필수품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치안 부재로 2차 위기

전 세계가 아이티 복구에 매달리고 있지만 컨트롤 타워 부재와 열악한 교통 사정으로 구호품 전달이 지연되면서 아이티는 여전히 통제 불능 상황이다. 수백명의 약탈꾼들이 건물 잔해로 상점 유리를 부순 뒤 물건을 훔치고 구호품 수송 트럭을 급습해 식량과 물을 강탈하는 사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무장한 미군이 공포탄을 발사하며 질서 유지에 나서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일 이 같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1500명의 경찰과 2000명의 평화유지군(PKO) 등 총 3500여명을 추가로 파병해야 한다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현재 아이티에는 9000여명의 군과 경찰이 유엔 안정화지원단(MINUSTAH)으로 활동 중이다. 셀소 아모링 브라질 외무장관은 "필요시 아이티에 추가 파병하겠다"며 반 총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한국도 평화유지군 파병을 검토 중이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국방부에서 현지 수요와 가용 병력 등을 우선적으로 검토할 것"이라면서 "구체적인 파병 규모 등은 이런 검토가 끝난 뒤에야 윤곽이 잡힐 것"이라고 덧붙였다. 파병 규모는 100~200명 정도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이 1만2000여명의 군을 파병했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는 회의론도 커지고 있다. 알랭 주양데 프랑스 협력장관은 "유엔이 미군의 역할을 명확히 해줘야 한다"며 "파병은 아이티를 돕기 위한 것이지 점령 목적이 아니다"고 쓴소리를 했다. '국경없는 의사회'도 "시급하게 조달해야 할 의약품들이 미군의 통제로 도착하지 못하고 있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아이티 구호에 나선 의사들은 "구호 작업이 지연될 경우 콜레라 간염 설사 등으로 인한 최악 상황이 도래할 것"으로 우려했다. 의료진이 부족한 가운데 이날 CNN 의학전문기자인 산제이 굽타가 미 항공모함에서 12세 아이티 소녀의 뇌수술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

◆재건 논의 가시화

아이티 재건을 위한 움직임도 조금씩 가시화하고 있다. 한 해 국가예산이 11억달러에 불과한 아이티는 해외 원조가 재정의 30~40%를 차지한다. 더글러스 알렉산더 영국 개발장관은 "150만 홈리스들을 위한 주거공간 마련과 교통 통신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세계식량프로그램(WFP)은 포르토프랭스 외곽에 10만명이 거주할 수 있는 임시 텐트촌 건설을 추진 중이다. 이라크 재건에 참여한 개발전문가는 "정부의 재난 통제 능력이 실종된 현 상황에선 유엔을 주축으로 한 각국의 직접 지원이 필요하다"며 "국제통화기금(IMF) 등 공신력 있는 기구가 세계 각국의 원조금액을 어떻게 배분할지 등을 결정,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외동딸 첼시와 함께 18일 아이티를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구체적인 원조 계획을 짤 수 있는 협력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까지 유엔은 필요 예산인 5억7500만달러 가운데 5100만달러를 모금했다.

외채 탕감 논의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아이티에 1억달러의 긴급 대출을 지원한 IMF는 총 19억달러의 외채 가운데 12억달러를 탕감해줬다. 프랑스도 400만유로의 외채를 경감해주기로 했다. 르네 프레발 아이티 대통령은 "민주체제를 공고히 하겠다"고 밝혔다.

김미희 기자 icii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