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가문을 이유로 언니의 결혼을 반대했다는 말에 건방진 인간으로 규정짓고,다아시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로 여긴다. 소설은 해피엔딩이지만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오해는 분노,분노는 증오를 불러 뻔한 사실조차 외면하게 만드는 탓이다. 오죽하면 며느리가 미우면 발 뒤꿈치가 달걀 같다며 구박한다는 말이 생겼으랴.편견과 선입견이 사람을 얼마나 몰지각하고 비이성적으로 만드는지 보여주는 예다.

"똑똑한 판사는 오판한다"는 말도 그래서 생겼을 것이다. 부족하다 싶은 판사는 판결에 앞서 양쪽의 주장과 증거를 충분히 검토하는 반면 똑똑한 판사는 뭐든 잘 안다는 생각에 자기 판단과 다른 주장과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진실과 어긋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얘기다.

똑똑할수록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건데 똑똑한 판사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실시한 법관 평가를 보면 예단과 편파적 재판(32%)이 가장 심각했고 고압적 태도나 모욕(30%)도 많았다고 한다.

법관의 태도가 문제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법정에 가본 사람 중엔 판사가 무턱대고 반말 내지 훈계조로 나와 당황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번 조사에서도 무조건 강제조정을 시도하거나 심지어 짜증난다고 한 사람까지 있었다는 마당이다.

물론 그런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5명 이상이 평가한 법관 108명의 평균은 76.44점,상위 15명의 평균은 97.33점인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하위 15명의 평균은 43.20점이고 21.67점도 있다는 사실은 같은 법을 다루는 법관의 자세가 얼마나 천차만별인지 드러내고도 남는다.

이 조사는 재판의 공정성에 상관없이 결과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더라도 "재판 결과에 불만을 갖기 쉬운 변호사들의 평가인 만큼 크게 신경 안쓴다"는 대법원 관계자의 논평은 듣기 거북하다.

법관의 권위란 법리와 증거에 충실하고 상식과 규범을 존중하는 성실성과 품격에서 비롯된다. 판사의 독립성을 앞세워 재판 관련자를 모욕하거나 상식과 동떨어진 판결을 하는 건 스스로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다. 세상은 달라진다. 조만간 평점 하위 명단이 공개될지도 모른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